문재인 대통령은 9일 개각에서 주미(駐美) 대사에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내정했지만, 외교·안보 주요 라인은 유임했다. 일본의 수출 보복, 중·러의 안보 위협,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및 호르무즈 파병, 중거리 미사일 배치 요구,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도발 등 산적한 외교안보 현안들을 현 외교안보팀으로 대처하겠다는 뜻이다. 정권의 얼굴 격인 원로들을 임명해왔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장관급)에는 반미(反美)·친북(親北) 발언으로 논란이 됐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기용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강경화 외교부장관과 정경두 국방부장관 유임에 대해 "교체할 시기가 아니라서 유임한 것"이라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전쟁 중에 장수를 교체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주미 대사 교체는 마지막까지 혼선을 빚었다. 청와대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를 주미 대사에 염두에 두고 검증을 진행해왔다. 청와대는 8일 오전까지 문 특보의 주미 대사 내정 보도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 특보의 주미 대사 내정에 대해 자유한국당 등 야당들이 반발했고, 문 특보는 8일 오후 "대사직을 고사했다"고 밝혔다. 결국 주미 대사직은 외교관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때 6자회담 수석대표와 국정원 1차장을 지낸 이수혁 의원에게 돌아갔다. 이 의원은 여권의 외교 전략통으로 꼽히지만, 서훈 국정원장이나 문정인 특보 같은 핵심 라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외의 인사로 평가받는다.

9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내정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작년 11월 15일 국회에서 강연하고 있다(왼쪽 사진). 주미 대사에 내정된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오른쪽 사진).

이수혁 의원의 주미 대사 내정에 대해 여권에서는 "미국이 거부감을 갖지 않는 외교관 출신인 점을 고려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주미 대사를 위한 검증에 동의하고 최근까지도 주미 대사직을 염두에 뒀던 문 특보가 임명 하루 전에 갑자기 고사했다는 점은 여러 의문을 낳고 있다. 문 특보는 "국내에서 할 일이 많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연말에 문 특보를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나 외교부 장관에 기용할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

일부에서는 문 특보에 대한 미국 내 반감 탓에 문 특보를 내정할 경우 미국 정부가 아그레망(주재국 동의)을 해주기 어렵다는 뜻이 청와대에 전달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문 특보는 여러 차례 반미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문 특보는 2017년 6월 세미나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고 말했고, 작년 4월에는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 미군을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일부에서는 미국에서 태어난 문 특보의 아들이 이중국적을 유지하다 2005년 한국 국적을 포기한 것이 검증에 걸린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한다.

장관급인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정세현 전 장관을 임명한 것도 논란이다. 청와대는 정 전 장관이 돌출발언을 할 때마다 "개인적 발언"이라고 해왔지만, 이제 정부의 공식 장관급 자리까지 줘버린 셈이다. 일부에선 "정 전 장관이 좀 조용히 지내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왔다.

한편 차관급인 국립외교원장에 임명된 김준형(56)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교수는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 참여한 인사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문정인 특보, 최종건 청와대 평화기획비서관 등은 이번 정부에서 외교안보 요직을 차지하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연정) 출신이다. 방송과 각종 행사에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대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