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박용만 회장의 51쪽 보고서부터 읽어보라

조선일보
입력 2019.08.10 03:10

日 수출 규제로 경제 휘청이는데 民·官·政협의회에 기업 들러리
효율 떨어지는 돈 풀기보다 규제 없애 산업 경쟁력 높여야

김영진 경제부장
김영진 경제부장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한국 경제가 휘청이고 있지만, 정작 위기 돌파를 주도할 기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정부가 정치권, 기업과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일본 수출 규제 해법을 찾아보자고 출범시킨 민·관·정(民·官·政)협의회를 보면 기업은 구색 맞춤용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지난달 31일 열린 민·관·정협의회는 사실상 정치 행사였다. 언론 카메라들이 몰린 이날 모두 발언엔 8명이 나섰는데, 5명이 여야 5당 정치인이었다. 저마다 일본 규탄에 열을 올리며 국민감정에 호소할 뿐 부품 국산화 외엔 별다른 대안이 없었고, 자기 당 입장을 부각하는 데 몰두해 대국민 선전장이나 다름없었다. 이날 일본 수출 규제 피해 당사자로 모두 발언 기회를 얻은 기업인은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딱 한 사람뿐이었다. 참석했던 김영주 무역협회장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장, 김용근 경총 부회장은 기념 촬영용 병풍이었다.

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내놓은 대책도 해마다 1조원 이상을 풀어 부품·소재·장비 산업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경기가 나빠져 올해부터 세수가 줄어들 판국인데, 돈 풀 궁리부터 하고 있다. 정부 지출을 늘리려고 세금을 더 걷거나 국채를 발행하면 그만큼 민간에 돌아갈 몫이 줄어드는 구축(驅逐) 효과가 나타난다. 효율이 떨어지는 정부 지출이 늘면 민간 투자는 밀려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실물경제는 장기 침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산업생산과 투자 부진에도 경기를 떠받쳤던 소비와 서비스업까지 감소세로 접어들었고, IMF 이후 가장 심각한 제조업 불황 여파는 경제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생산과 투자·소비가 동시에 쪼그라드는 복합 불황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미·중 무역 전쟁은 환율 전쟁으로 확산하며 글로벌 경제 환경도 점점 악화되고 있다. 지금 위기를 이겨내고 한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주체는 정부나 정치권이 아니라 기업이다. "고용을 많이 창출해 세금을 많이 내는 기업이 애국자"라는 현 정부 실세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발언이 진심이라면 이젠 기업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민·관·정협의회에서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던 박용만 회장이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턱을 괸 채 한편을 응시하는 장면이 유독 눈에 띄었다. 박 회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일본 수출 규제 사태가 터지기 보름 전쯤인 지난 6월 17일 여야 5당 원내대표를 만나 하루빨리 경제 활성화 법안을 처리해 달라고 읍소했다. 제발 규제 좀 풀어 달라는 메시지였다. 20대 국회 출범 이후 국회를 쫓아가 규제 완화를 요청한 건 이번이 11번째였다. 국회 문이 닳도록 찾아가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정치인들이 바로 옆에서 자신을 들러리 삼아 앉아 있는 모습에 기가 차지 않았을까.

박 회장이 정치인들에게 일일이 전달한 51쪽짜리 '경제 활성화를 위한 조속 입법 과제'엔 경제계의 숙원을 정리한 17개 과제가 담겨 있었다. 지금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주 52시간제를 보완할 탄력근로시간제 개선안, 신성장 산업에 대한 R&D(연구·개발) 투자 지원안, 원격의료 허용을 포함한 의료 산업 선진화 방안 같은 규제 개혁안이 망라돼 있다. 전직 경제 장관은 "돈 안 들이고 경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규제를 없애는 거다. 규제를 풀면 기업이 알아서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일자리까지 생긴다"고 했다. 정치인들은 박용만 회장이 건넨 조속 입법 과제를 한 번씩 읽어보고, 행동에 옮겨보기를 권한다. 거기 나온 과제들만 국회를 통과해도 정부가 수조원씩 퍼부어 키우고 싶어하는 산업 경쟁력은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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