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돼야 살 수 있다… 넘어지고 깨달았다

조선일보
입력 2019.08.10 03:00

[아무튼, 주말- 김미리 기자의 1미리]
돌아온 '코미디 황제' 심형래
"전두환 때는 지침만 따르면 됐는데… 요즘은 웃기기 힘든 시대"

카메라 앞에 서자 심형래는 자동으로 영구 자세를 취했다. 동작은 그대로인데 인상은 변했다. ''용가리' 찍다가 구안와사(입과 눈 주변 근육이 비뚤어자는 질환)가 왔어요. 아직도 오른쪽 눈이 잘 안 떠져서 쌍꺼풀 수술을 했습니다.' 그는 '쌍꺼풀 재수술 때문에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를 함께한 남기남 감독(지난달 24일 작고) 장례식에 못 갔다'며 아쉬워했다.
카메라 앞에 서자 심형래는 자동으로 영구 자세를 취했다. 동작은 그대로인데 인상은 변했다. "'용가리' 찍다가 구안와사(입과 눈 주변 근육이 비뚤어자는 질환)가 왔어요. 아직도 오른쪽 눈이 잘 안 떠져서 쌍꺼풀 수술을 했습니다." 그는 "쌍꺼풀 재수술 때문에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를 함께한 남기남 감독(지난달 24일 작고) 장례식에 못 갔다"며 아쉬워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어, 심형래 아냐?" 서울 광화문에서 심형래(61)를 만나 잠시 길을 걷는데 중년 행인들이 수군거렸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20대들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젊은 사람들은 선생님 잘 모르는 거 같습니다." 기자가 말하자 심형래가 발끈했다. "에이, 왜 몰라. 다 알아요."

호칭이 어정쩡해 '선생님'이라 했더니 매니저가 귀띔했다. "감독님으로 불러 주시겠어요?" '영화감독 심형래' 이전 '개그맨 심형래'부터 알았던 기자에겐 영 입에 안 달라붙는 호칭이었다. 심형래에게 다시 물었다. "아직 감독으로 불리고 싶은가요?" "감독이든 사장이든 아무렇게나 불러요. 형래야 해도 되고. 그게 뭐가 중요해요." 심형래가 깔깔 웃었다. 그제야 '영구'가 보였다.

1980년대 심형래를 추억하는 사람이라면 반가운 소식일지도 모르겠다. 심형래가 정통 코미디로 방송에 복귀했다. 지난 4월 채널 '코미디 TV'에서 시작한 공개 코미디쇼 '스마일 킹'을 통해서다. 방송 고정 출연은 2004년 '쇼 행운열차' 이후 15년 만. OBS에서 '심형래의 별별장터'도 8일 시작했다. 개그맨들과 악극 스타일로 꾸며 중소기업 제품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반응은 아직 뜨뜻미지근하다. 인생 풍파 다 겪고 그는 왜 코미디로 돌아왔을까.

고공 낙하 인생

이런 추락도 드물다. 심형래는 톱 중의 톱이었다. 1982년 KBS 공채 개그맨 1기로 데뷔해 7개월 만에 정상에 올랐다. 지금의 강호동·유재석과는 비교 안 될 정도로 인기였다. CF, 영화,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온 세상이 심형래 천지였다. 80년대 연예인 소득 1위. 개그맨으로 연 인생 1막은 대성공이었지만, 영화로 시작한 2막이 화근이 됐다. 1993년 영화 제작사 '영구아트무비'를 설립하고 영화감독으로 변신했다. 1999년 영화 '용가리'덕에'신지식인 1호'로까지 선정됐지만 '디 워(2007년)' 이후 무리한 투자로 2011년 회사를 경매에 넘겼다. 직원 임금 체불, 도박설 등 각종 구설에 얽혔다.

―인터뷰한다고 하니 대뜸 '비호감' '사기꾼 아니냐'는 반응이 많더군요. 어쩌다 논란의 인물로 전락했습니까.

"돌이켜 보니 잘나갔을 때 너무 자만했습니다. 심형래가 못 할 게 뭐가 있겠느냐면서 이것저것 했지요. 자신감이 없어도 안 되지만 지나쳐도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자업자득 아닙니까. 임금 체불 때문에 전 영구아트 직원하고 소송이 붙었지요. 공금 횡령, 총기 소지 혐의로 입건도 됐습니다(회삿돈으로 강원랜드에서 도박하고 불법 개조한 총기를 소지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 문제는 해결됐습니까.

"2013년 서울남부지검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습니다. 문제 생겼을 땐 그렇게 떠들썩했는데 무혐의 받은 건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회사가 경매로 넘어가 생긴 돈으로 직원들한테 밀린 임금은 줬는데 퇴직금까지 줄 형편은 못 됐습니다. 돈이 생기면 퇴직금까지 꼭 챙겨주고 싶습니다."

―80년대 수입 1위 연예인에서 2013년 개인 파산. 삶이 고공 낙하했습니다.

"롤러코스터도 이런 롤러코스터가 없죠. 80년대 초반 압구정 현대아파트 35평짜리를 7800만원에 샀어요. 그때 제 롯데제과 1년 계약료가 8000만원이었습니다. 월드콘, 팔도라면, 빼빼로…. CF 휩쓸었어요. 영화 118편(제작 13편)을 했어요. 영화배우 중에 제일 잘나가던 안성기 형 출연료가 3000만원이었는데 제가 2억원을 받았어요. 그렇게 번 돈 영화에 다 부어 넣고 2011년 쫄딱 망했죠. 63억원까지 갔던 타워팰리스 집(101평)이 경매로 넘어갔습니다." 이혼하고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왔다. 수중의 전 재산 230만원. 월세(月貰) 치를 돈도 안 돼 일세(日貰) 원룸에 들어갔다. 2남 5녀 중 막내아들인 자신을 끔찍이 아꼈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불행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한때 '신지식인 1호'로 선정돼 승승장구했습니다.

"김대중 정부 탄생하면서 '신지식인'이란 걸 만들고 저를 1호로 정했지요. '용가리'가 잘나갈 때였어요. 2호가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공동 대표였어요. 돈 한 푼 안 받았습니다. 지금 보면 정부 프로젝트가 다 그렇듯 그 당시 인기 있는 사람 골라 써먹고 버리는 식이었죠. 제가 정치색이 없으니 편했을 테고."

―낭떠러지로 추락했을 때 어땠습니까.

"극단적 생각도 했습니다. 전화번호를 다섯 번 바꿨습니다. 위로도 싫어 다 끊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원룸에 혼자 처박혀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하느님이 저를 살리려고 망하게 했나 싶더군요. 영화 할 때 스트레스가 많아 건강이 너무 안 좋았거든요. 문득 하느님이 모두에게 자신만의 콘텐츠를 줬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처럼요."

―그렇게 발견한 당신의 재주가 무엇이던가요.

"남들과 다른 아이디어로 콘텐츠 만드는 재주. 곰곰이 생각하니 바보 캐릭터도 그 덕에 탄생한 거였습니다. 데뷔했을 때 주병진, 김형곤, 이성미 등 쟁쟁한 선배가 참 많았습니다. 그냥 웃기면 튈 수가 없겠더군요. 나만의 캐릭터를 고심하다 만든 게 바보 캐릭터였습니다. 1982년 '어떤 도둑'이라는 코너를 했는데 혀 짧은 소리로 '꼼딱 마라'라고 해봤어요. 사람들이 자지러집디다. 7개월 만에 당시 난공불락이던 (이)주일이 형을 누르고 코미디언 인기 1위가 됐습니다. 이후 '주민등록 좀 봅시다' '하룡서당' '영구야 영구야' 같은 코너로 쭉 바보를 밀고 나갔습니다. 목숨을 끊으면 나를 최고로 만들었던 이런 재주도 사라져 버리는 거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3년 전쯤 '강경 젓갈 축제' 일을 하는 아는 동생이 와서 공연을 부탁했다. 명란젓, 꼴뚜기젓 파는데 명색이 심형래가 어떻게 가느냐며 손사래 쳤다. 하도 사정해서 못 이기는 척 갔는데 그곳에서 펄떡이는 삶을 마주했다. 후배들을 그러모아 '심형래 유랑극단'을 만들었다. 첫 공연 한 시간 전, 몇 천 석 되는 객석이 텅텅 비어 있었다. 망했구나 싶었는데 웬걸. 막이 오르자 객석 바깥까지 사람들이 넘쳤다. "아직 나를 안 잊은 팬들이 있구나, 눈물 날 정도로 고마웠습니다. 연예인은 관객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혼자 시건방 떨어봐야 소용 없습니다. 그분들 덕에 무대에 다시 설 용기를 얻었습니다." 1년 전 선배들과 마당극 '뺑파게이트'에도 참여했다.

코미디 불쏘시개로 돌아왔다

―'스마일 킹'으로 돌고 돌아 본업(本業)으로 왔습니다. 왜 방송으로 컴백했습니까.

"1년 전쯤 후배 박승대가 와서 '형님, 같이 코미디 살려 보자'고 합디다. 처음엔 두려워서 안 한다고 했어요. 내 코미디가 요즘 트렌드하고 맞을까 싶기도 하고, 자식뻘 후배들하고 같이 해야 한다는데 나이 먹고 망신만 당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승대가 선배들이 하나둘 세상 떠나고 명맥 이을 사람이 몇 없다면서 '형님이면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 열아홉 살 때 '쇼 비디오자키' 시절부터 봐왔는데 끝까지 뿌리칠 수는 없었어요."

심형래의 복귀 방송인 '스마일 킹' 속 '단군의 후예들' 코너. 유머일번지 '변방의 북소리'를 2019년 버전으로 만들었다.
심형래의 복귀 방송인 '스마일 킹' 속 '단군의 후예들' 코너. 유머일번지 '변방의 북소리'를 2019년 버전으로 만들었다. / 코미디 TV
스마일 킹에서 '단군의 후예들'이라는 코너를 맡았다. 유머일번지 '변방의 북소리'와 비슷한 슬랩스틱(몸 개그) 포맷. 바보 병사로 등장해 시도 때도 없이 맞고 자빠진다.

―58 개띠. 환갑이 넘었습니다. 몸이 버텨내나요.

"처음 녹화하는데 저도 놀랐습니다. 몸이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지금도 거뜬합니다."

―코미디 불씨를 살리는 불쏘시개로 돌아왔다는 말씀인데, 반응은 냉정합니다. '몇 십 년 전 걸 똑같이 우려먹느냐'는 싸늘한 댓글도 많던데요.

"요즘은 볼 게 넘쳐 나잖아요. 사실 비슷하게 보이는 거지 내용은 다릅니다. 슬랩스틱이라는 장르가 다들 비슷하게 보이는 착시 효과도 있고, 심형래 바보 캐릭터가 너무 세니까 달리해도 똑같게 보이는 겁니다. 찰리 채플린이 나와서 하면 다 똑같이 보이는 것처럼요."

―세상도, 사람도, 웃음의 결도 바뀌었기 때문 아닐까요.

"맞아요. 예전엔 코미디 프로가 다 녹화였어요. 요즘은 공개 코미디잖아요. 여차하면 말실수로 이어져 순간에 '폭망'하는 시대더군요. 콘텐츠 제약도 많습니다. 아이디어 회의 하는데 무슨 말만 하면 후배들이 '선배 요즘 그런 거 하면 큰일 나요' 합니다. 여혐, 장애인 비하 등등. 심의 까다롭던 전두환 정권 때도 지금보단 수월했어요. 그땐 지침이 명확하게 내려와서 그것만 지키면 됐어요. 지금은 각종 단체 많으니 알아서 조심해야 하는데 그게 더 어려워요. 이거 빼고 저거 빼면 할 게 없어요. 예전보다 훨씬 웃기기 힘든 세상입니다. 요즘 태어났으면 개그맨 심형래는 없었을 것 같아요(웃음)."

양탄자 깔린 삶은 없다

―제자리를 찾아오니 어떻습니까.

"내 자리란 생각보다 언제 떠야 하나 하는 생각부터 듭니다."

―오자마자 떠날 생각을 한다고요?

"코미디 시장이 참 냉정합니다. 웃기는 동력 떨어지면 바로 퇴출당합니다. 지금은 속도가 더 빨라졌고요. 과거 KBS 시절엔 회사 다니듯 개그 했습니다. 웃기든 안 웃기든 별 상관 안 했습니다. 요샌 코미디 환경은 열악한데 채널이 많아져 경쟁은 심해졌습니다."

'슬랩스틱(몸 개그)의 전설'답게 심형래가 시원하게 자빠졌다. 환갑 넘은 나이에도 균형을 꽤 잘 잡았다. '젊은 시절 하도 많이 해서 몸이 기억하더라고요.'
'슬랩스틱(몸 개그)의 전설'답게 심형래가 시원하게 자빠졌다. 환갑 넘은 나이에도 균형을 꽤 잘 잡았다. "젊은 시절 하도 많이 해서 몸이 기억하더라고요."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웃기기 어려워도 웃음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전엔 영구 자빠지면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전 국민이 다 같이 웃었어요. 싸우다가도 변방의 북소리 시작하면 화해하고 같이 웃고. 공통 소재가 있으니 세대 갈등도 덜했지요. 지금은 사회가 너무 메말랐습니다. 여자분한테 좋은 뜻으로 말을 해도 눈치 봐야 합니다. 무관심이 최고 미덕이 됐습니다. SNS, 유튜브엔 '독한 웃음' 천지고요. 건전한 웃음이 그만큼 필요한 세상이 됐습니다."

―그나저나 어디로 뜬다는 건가요.

"제 최종 꿈은 테마파크를 만드는 겁니다. 1980년대 초반 신인 때 미국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갔다가 충격받았어요. 우리나라는 놀이 공원 가면 하나같이 청룡열차, 바이킹인데 거기는 캐릭터를 이용해서 상상력으로 테마파크를 꾸며 놓았더군요. 우리나라에 이런 걸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괴수 영화를 한 것도 테마파크에 넣을 콘텐츠를 축적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또 일을 벌이는 겁니까. 그냥 잘하는 코미디로 한 우물 팠으면 성공했을 텐데 안타깝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코미디에 뼈를 묻지 않았느냐고들 묻습니다. 저는 코미디에 뼈를 묻기 위해 테마파크를 만드는 겁니다. 희극인 선배 중에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후배들한테도 뭔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돈 벌어 연예인이 식당 차리고 술집 차리고가 아니고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걸 만들어 그 안에 희극인들이 설 무대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용가리와 디 워를 활용한 테마파크 구상도를 기자에게 보여 주며 관심 있는 업체들과 협의 중이라고 했다. "2016년 중국 화런글로벌 영상사업공사로부터 투자 받아 '디 워 2'를 추진했지만 사드 사태 때문에 엎어졌다. 최근 미국 소니 본사를 찾아 다시 구체적으로 협의하고 있다"며 소니 관계자와 만난 사진도 보여줬다.

―한번 찍힌 낙인은 잘 안 지워집니다. 허언(虛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디 워' 미국 개봉한다고 했을 때도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2277개 개봉관에 걸렸습니다. 국내에서 화제가 되니 '국뽕' '애국심 마케팅'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작품성에 대한 비판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국심 때문에 영화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번엔 믿어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 된 다음 보여주겠습니다."

―그렇게 실패하고도 또 하고 싶습니까.

"모든 게 실패는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막대한 돈을 투자해 CG에 공들인 결과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김기범 CG(컴퓨터 그래픽) 감독 같은 인재가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김 감독은 영구아트 직원 시절의 '디 워' CG 경험을 발판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트랜스포머3' '어벤져스' 등 대작의 CG 작업에 참여했고, 올해 개봉한 '알리타: 배틀 엔젤'에선 CG를 총괄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CG에 몰두하게 해준 심형래 감독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코미디는 왜 합니까.

"테마파크 쪽만 몰두하려니 요즘 친구들은 심형래가 누군지 모르는 겁니다. 꾸준히 대중과 소통하는 게 필요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코미디를 합니다. 저는 천생 광대입니다. 테마파크를 만들고 고정 수익이 발생하면 그 돈으로 양질의 코미디도 만들 겁니다. 그게 제가 우리 희극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심형래는 다시 일어설 진짜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인생의 나락에 떨어져 보니 절망에 빠진 사람들 심정을 알겠더군요. 이 세상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안타깝게 목숨을 포기합니다. 저만큼 낙폭 큰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극단 케이스인 제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그분들께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평생 양탄자 깔린 삶은 없습니다." 돌아서는 길, 담배 한 개비 피우더니 심형래가 승용차에 올라탔다. 차 번호가 눈에 띄었다. '0009'. 영영영구. 우연일까, 집착일까. 환갑 넘은 '영구'의 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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