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하지 못한 연애를 후회합니까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08.10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선배인 W 교수는 "연애를 해보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40이 되도록 결혼을 못 하고 있다가 제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연애 기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학생 때 일본은 연애 지상주의 시대였다. 우리도 춘원 이광수를 비롯한 문인들은 연애에 관심이 많았다.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결혼보다는 멋진 연애가 아쉬웠던 것 같다. 내가 그 당시 화제가 되었던 사건 하나를 W에게 소개해 준 적이 있다.

전에 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일본 동북제대에 아리시마(有島)라는 교수 겸 작가가 있었다. 유럽 여행을 하다가 미술 공부하러 먼저 가 있던 동생 집에 들렀다. 2주 동안 머물기로 되어 있었다. 형을 맞이한 동생이 프랑스 현지 친구들 몇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아리시마는 그곳에서 질타라는 한 독일 여성을 소개받았다. 이상할 정도로 두 젊은이는 첫눈에 반하는 운명에 빠진다.

아리시마는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질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랑하고 싶지만 결혼을 약속한 남성이 있어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날 질타에게 "누구와 같이 와도 좋으니까 꼭 한번 일본을 방문해 달라"고 애원했다. 여자는 망설이다가 그 약속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후에 그 교수는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불행하게도 그 여성은 유부녀였다. 사랑은 깊어졌고 사회적 제약은 높아져갔다. 마침내 두 사람은 태평양에 몸을 던졌다. 영원한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한 셈이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는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지 모른다. (…) 지금의 나는 바다 위에 떠다니는 나뭇잎 하나와 같다. 나와 함께 빠져드는 운명의 여인을 사랑하고 싶다'고 썼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사회가 조용해졌을 때 독일에서 질타 여사가 찾아왔다. 장미꽃 한 아름을 아리시마의 묘역에 바치고 며칠 후에 돌아갔다. 약속을 잊을 수 없어 늦게나마 다녀간다고 했다.

또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아리시마의 조카딸이 유럽 여행을 갔다가 질타 여사의 집을 방문했다. 할머니가 된 질타 여사는 혼자 살고 있었다. 집 안은 아리시마에 관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서들은 물론 작가에 관한 기록과 유물들을 간직한 것이다. 큰 사진이 정면에 걸려 있고 떠날 때 남겨주고 간 물건들도 그 밑에 보관되어 있었다. 조카가 물었다. "그러면 결혼은?" 하고. 질타 여사는 "내가 당신 큰아버지를 그렇게 그리워할 줄은 몰랐다. 정말 사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사연을 W 교수에게 소개하면서 "그래도 연애 못 한 것을 후회하느냐"며 웃었다. 철학자 파스칼의 글 한 구절도 추가해 주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고 싶은가. 연애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왕실과 귀족 남성들이 여자를 위해 결투를 했는가 하면 사랑 때문에 전쟁까지 감행한 역사를 보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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