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뉴스 저격] "日보복 1년만 견디자고?… 과학장인 키워낼 시스템 새로 짜야"

입력 2019.08.09 03:01

일본의 수출 규제에 맞서 원천기술 자문단 운영하는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

지난 5일 카이스트(KAIST)는 전·현직 교수 100여명으로 일본 수출 규제에 맞서 반도체·에너지·자동차 등 주요 산업에서 원천기술 개발을 도울 자문단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은 자문단과 관련해 전체 교수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과거 무력이 주도하던 시대에는 군인이 나라를 지키는 전사였지만 4차 산업혁명 기술 패권 시대에는 과학기술인들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며 "한·일 무역 전쟁으로 촉발된 현재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단기적으로는 기술자문단이 '119 기술구급대' 역할을 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카이스트가 해당 분야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데 국가 전위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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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철 카이스트 총장은 7일 본지 인터뷰에서 “지금처럼 연구자들이 인건비 건지려고 단기 과제에만 몰리면 일본 수준의 소재나 부품을 절대 개발할 수 없다”며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를 계기로 우리나라 연구·개발(R&D)의 판을 새로 짜자”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신 총장의 호소에 과학계가 일어서고 있다. 이틀 뒤 서울대 공대는 국내 기업의 소재 기술 국산화를 도울 특별자문단을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일본 수출 규제 적극대응 위원회'를 구성하고 기업의 소재·부품·장비에 대한 신뢰성 평가를 돕겠다고 나섰다. 정부 연구소들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특허 기술이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하지만 신 총장은 지난 7일 조선일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누가 일본 수출 규제에 대해 기업들에 1년만 견디라고 했다는데 과학자들이 총동원돼도 그렇게 단기간에 국산화 성과를 낼 수는 없다"며 "오히려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의 연구개발(R&D) 전략을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새로운 성장판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소재와 부품, 장비에서 앞선 것은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판 '과학 장인(匠人)'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 총장은 일본에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안긴 청색발광다이오드(LED)를 예로 들었다. 20년 넘게 나고야대가 기초연구를 하고 이 기술이 니치아화학이라는 중소기업으로 연결돼 세상을 바꾸는 신기술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컴퓨터 하드디스크에서 MRI(자기공명영상) 장치까지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 네오디뮴(NIB) 자석도 마찬가지다. 신 총장은 "도호쿠대에서 20년 넘게 강력한 자석을 연구한 결과가 스미토모 특수금속에 이전돼 모터가 들어가는 모든 제품의 필수품이 됐다"고 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1997년에야 3년 단위로 3번 연장이 가능한 연구 과제가 처음 나왔을 정도로 장기 연구의 전통이 턱없이 부족하다. 공무원들은 짧은 임기 동안 성과를 내기 위해 단기 연구 과제만 만들었다. 정부는 연구자 간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인건비를 외부에서 연구 과제를 수주해 충당하도록 했다. 그러자 연구자들은 여러 과제를 동시에 하기 위해 소형 단기 연구만 찾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독창적인 연구에 오랫동안 매달리는 연구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비 투자가 세계 1위임에도 연구 논문 편수는 12위에 그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 총장은 "세상을 바꿀 신기술을 개발하려면 아무도 하지 않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그러면 당장 연구비가 잘리고 승진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신 총장은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하던 식으로 땜질식 처방을 하면 위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급하게 이 분야 저 분야 찍어서 연구비를 쏟아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번 기회에 최소 1년은 세계 산업 생태계를 분석해서 우리가 어느 분야에 경쟁력이 있는지, 해외에서는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하는지 알아내 기술 혁신 로드맵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신 총장은 "이번에는 정부가 제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 총장은 구체적으로 먼저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우리 중소기업이 연구 역량을 집중할 분야를 선택하자고 제안했다. 글로벌 분업 경제 체계에서 우리나라가 모든 것을 국산화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했다. 대신 기업을 지원하면 '적당한 국산화 정도가 아니라 세계 시장을 장악할 최고 기술'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중소기업이 기술을 개발하면 대기업이 테스트베드(시험장) 역할을 맡아야 한다.

신 총장은 "회사 규모가 작아도 관련 세계 시장을 장악한 히든 챔피언 기업이 독일은 1300여곳인데 우리는 10분의 1에 불과하다"며 "우리 중소기업이 국내 대기업의 혹독한 기준을 통과하면 바로 히든 챔피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별 연구개발 역량 비교 그래프

신 총장은 해외에서도 우군(友軍)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선진국의 대학, 연구소와 공동 연구를 획기적으로 늘려 부족한 연구 역량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한국 연구자들이 해외로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도 했다. "우수 연구자가 해외로 가면 단기적으로는 인재 유출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의 경제 지경(地境)을 넓힐 겁니다. 나중에 삼성전자와 구글이 협상하는 데 한국 연구자가 구글 대표로 나오게 해야 합니다."

신 총장은 "카이스트가 우리나라 R&D 판을 바꾸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그는 가칭 '특이점(特異點·Singularity) 교수직' 신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특이점은 2005년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이 컴퓨터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뛰어넘는 시점으로 주창한 개념이다.

"아이디어가 좋으면 10년, 20년 교수 평가를 유예하고 논문, 특허 없어도 전폭적인 연구 지원을 하자는 겁니다. 석좌교수나 특훈교수는 과거 업적으로 평가하지만 특이점 교수는 오로지 아이디어의 가능성만 보겠습니다." 신 총장은 "남들이 하는 거 좇아가는 교수는 많지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다"며 "연구 현장 곳곳에서 특이점 교수들과 같은 연구자가 늘어나야 새로운 도약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 총장 "日과의 기술력 차이는 엄연한 현실, 하지만 희망 있다"]

"수출의 18%밖에 안되는 中企…
국가 R&D로 경쟁력 키우면 더 큰 해외시장 잡을 수 있어"

신성철 총장은 "일본과의 기술력 차이는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가 2017년 4.5%로 세계 1위에 올랐다지만, 연구비의 절대 규모는 일본의 절반에 그친다는 것. 미국, 중국에 비하면 6분의 1 수준이다. 연구원 수도 일본의 절반이다. 중국에 비하면 5분의 1, 미국과는 4분의 1에 그친다. 신 총장은 "일본은 100년 전부터 기초과학을 연구했지만 우리나라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투자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아직 기초체력을 다질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 총장은 "희망은 있다"고 했다. 그는 "올 초 참석한 세계경제포럼에서 한국과 독일, 일본을 제조업의 3대 선도국가로 뽑았다"고 말했다. 신 총장은 "지난달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대학 혁신 콘퍼런스에 참여했는데 현대차로 나를 데리러 오고 롯데호텔에 묵으며 삼성전자 광고판만 봤다"며 "25년 전 모스크바에 갔을 때는 소니, 도시바, 도요타 등 일본 기업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소기업이 수출의 18%만 차지하는데 이들의 경쟁력을 키우면 더 큰 해외 시장을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며 "국가 R&D가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철(申成澈) 총장은

1952년생으로 카이스트 동문 출신 첫 총장이다. 서울대 응용물리학과를 나와 카이스트에서 고체물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재료물리학 박사를 취득했다. 나노미터(10억분의 1m) 수준의 자성(磁性) 물질을 다루는 나노자성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꼽힌다. 1989년 귀국해 카이스트 교수로 임용된 후 20여년간 300여편의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특허 37건을 등록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미국물리학회 석학회원으로 선정됐다. 2011년부터 2017년 2월까지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초대, 2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2017년 네 차례 도전 만에 카이스트 총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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