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방서 몰려오는 복합 위기, 극복 못 하면 미래는 없다

조선일보
입력 2019.08.03 03:15

국제사회 우려에도 불구, 일본 정부가 2일 한국을 수출 심사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1100여 가지 전략 물자의 대(對)한국 수출을 일본 정부가 직접 틀어쥐고 일일이 규제하겠다는 것으로, 반도체 소재 3종에 이어 2차 확전(擴戰)을 감행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부당한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해 상응하는 조치를 단호하게 취해 나갈 것"이라며 "지지 않을 것"이라고 대응 방침을 밝혔다. 이로써 한·일 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의 격랑으로 들어가 사실상 적대국이 됐다. 온갖 풍파 속에서도 어렵게 쌓아올린 양국 간 우호 협력 관계를 한순간 파국으로 몰고 간 일본의 경제 보복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이 서로를 '믿을 수 없는 나라'로 규정한 것은 반세기 넘게 동북아 안보의 밑받침이 돼온 한·미·일 삼각 협력 체제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한반도에 밀려오고 있는 거센 풍랑에 우리가 벌거벗은 채로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6·25 이후 이렇게 사방에서 위기가 복합적으로, 쓰나미처럼 밀려온 적이 있었느냐는 생각이 든다.

지금 동북아 안보는 시계 제로 상태다. 미국과 패권 쟁탈전을 벌이는 중국, 역내 영향력 증대를 모색하는 러시아는 팽창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한·미·일 공조의 가장 약한 고리인 한·일 간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 독도 영공 침범은 시작이고 앞으로 어떤 더한 도발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 중국 외교부장은 일본과 싸우고 있는 한국을 향해 사드 문제를 다시 제기했고, 중국 관영 매체는 "힘이 약하면 도망치거나 (승산이 없으면) 피해야 한다"며 한국을 조롱했다.

문재인 정부가 '올인'하다시피 공을 들인 북한은 노골적으로 우리를 깔아뭉개며 위협하고 있다. 김정은은 SLBM 3발을 탑재할 수 있는 신형 잠수함 시찰로 '핵보유국'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데 이어 연일 '대남 경고' 딱지를 붙인 탄도미사일 발사로 대한민국 안보를 위협했다. 우리 군은 요격 능력을 보여주기는커녕 미사일의 비행경로도 제대로 추적하지 못했다. 우리 군의 '탄도미사일' 분석에 북이 "신형 방사포'라며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평화 무드에 취해 있던 우리 군이 능멸을 당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판문점 이벤트'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실무 협상을 외면하면서 북핵 폐기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일본을 제어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미국마저 형식적으로 '중재' 시늉만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겨냥한 북 미사일을 "미국 위협이 아니니 괜찮다"고 하고,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늘릴 궁리만 하고 있다. 농산물 개방 위협도 가하고 있다. 자칫하면 경제와 안보가 동시에 위태로워지는 중대한 시점인데도 기댈 곳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일이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같은 자해적 보복전을 벌인다면 한반도 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튈지 가늠되지 않는다.

일본의 보복은 안 그래도 침체에 빠진 한국 경제를 더욱 미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당장 일본산 소재·장비의 수입이 끊어져 제조업 가동이 중단되거나 하는 사태가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한국이 화이트리스트 국가가 된 것은 2004년이며 그 전에도 한·일 간 경제 교류는 문제없이 지속돼왔다. 그러나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주력 산업의 목줄을 일본 정부가 쥐게 된 셈이어서 불확실성이 커졌다. 지난해 전체 성장률의 절반에 기여한 반도체가 일본의 소재 3종 수출 규제로 급소를 찔렸다. 일본 의존도가 90%도 넘는 품목을 수입하는 기계, 화학, 자동차 부품 업종은 이번 2차 보복으로 초비상 상황이다. 양국이 외교적 해법을 찾지 못해 사태가 장기화한다면 주력 산업의 미래 잠재력이 송두리째 훼손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과거에도 그래 왔듯이 우리는 역경을 오히려 도약하는 기회로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에겐 그런 역량이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경제에 상당한 타격이 예상되지만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처해 실력을 키우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정부부터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 최대 피해자는 기업이다. 정부는 "충분히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기업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숨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는 초비상 상태다. 정부는 반도체 호황과 세수 풍년에 기대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면서, 기업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반(反)기업 정책을 서슴없이 밀어붙여 왔다. 일본의 보복으로 위기에 몰린 기업들을 안에서 발목 잡는 일을 해선 안 된다. 기업 활동을 억누르는 일련의 반기업 정책을 수정하고 과도한 노동 편향 기조를 전환해야 한다. '죽창가' '의병' '거북선' 같은 감정적 선동은 자제하고 냉정하게 현실적 대응책과 전략을 짜내야 한다. 위기를 관리하고 대응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전략적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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