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와 관련, 청와대 소득주도성장특위 위원장이 "중소기업이 기술을 개발해도 대기업들이 수입하는 쪽을 택해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며 또 대기업 탓을 했다. 지난주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국내 중소기업도 불화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데 대기업이 안 사주는 게 문제"라고 했고,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의원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일본의 소재·부품 기업을 1위로 띄워 올리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기업 경영자들 앞에서 "중소 업체가 개발에 성공해도 수요처를 못 찾아 기술 등이 사장되기도 했다. (대기업들이) 일본과의 협력에 안주했다"고 말했다.
대기업들로선 기가 막힐 일이다. 국산화는 '안 했다'기보다 '못했다'고 봐야 한다. 반도체 제조용 '불화수소'는 일본산 순도가 99.9999999999%에 달하는 반면 국산은 99.9% 정도에 그친다. 일본산을 써야만 제품 불량을 제로(0)에 가깝게 유지할 수 있다. '포토 레지스터'도 국산이 있지만 품질이 낮아 10나노급 초미세 반도체 제조 공정에는 쓸 수가 없다. 폴더블폰에 쓰이는 접히는 투명 필름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국내에선 대체품을 만들 수조차 없다. 안타깝게도 소재·장비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아직 크다. 이것은 국가 전체의 과학기술 역량의 문제다. 우리는 역량을 꾸준히 높여왔고 여기엔 대기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품질이 떨어져도 국산을 쓰라니, 대기업에 글로벌 품질 경쟁을 포기하고 망하라는 말과 같다.
'대기업 탓'은 글로벌 분업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이기도 하다. 국제 분업은 서로 비교 우위를 가진 품목을 생산·교환함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이다. 모든 글로벌 기업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최적의 품질과 성능의 소재·부품을 가져다 쓴다. 공급 체인망의 모든 공정을 다 갖춘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 삼성전자에 왜 핵심 부품·소재를 국산화하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건, 삼성 반도체를 가져다 스마트폰을 만드는 애플에 왜 미국산 반도체를 쓰지 않냐고 윽박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반도체 공정에 국산 소재만 썼다면 지금의 1등 신화는 없었다.
우리는 소재·부품 대신 비교 우위에 있는 제품 기획·조립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 짧은 시간 안에 완성품 위주의 일류 산업군(群)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평가받을 일이지 결코 타박받을 일이 아니다. 정부는 대기업을 탓하기에 앞서 규제와 지나친 노동·환경 편향 정책들로 부품·소재 산업의 발전을 막아온 것부터 고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