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경] 물새는 항모·뭉개진 잠수함… 대영제국 해군이 어쩌다 이 지경

조선일보
입력 2019.07.29 03:00

이란에 유조선 나포때도 손 못써… 러 항모 英해협 통과도 지켜만 봐
1차대전 前까지 해군력 2·3위국 합친 것보다 강해… 현재는 8위 수준

지난 19일(현지 시각) 호르무즈해협을 지나던 영국 유조선 스테나 임페로호가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나포됐다. 당시 혁명수비대는 스테나 임페로호에 "지시에 복종하면 무사할 것"이라며 "당장 항로를 360도로 돌려라"고 협박했다. 영국 호위함 몬트로즈함이 이 협박 내용을 감청했지만 "당신들이 국제법을 위반할 의도가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해 달라"는 무력한 요청만 반복했을 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40㎞나 떨어진 해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란은 "호르무즈를 지나는 영국 선박은 조심하라"고 오래전부터 경고해왔다. 지난 4일 영국 해군이 자국 선박을 억류한 것을 보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영국이 자국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걸프 해역으로 배치한 함정은 몬트로즈함 1대뿐이었다.

세계 바다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의 왕립 해군(Royal Navy)이 어쩌다 이런 수모를 겪게 됐을까. 영국 해군이 스테나 임페로호 나포와 같은 굴욕적인 사건·사고를 겪은 것은 최근 수년간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과 이듬해 1월에는 시리아 공습 작전을 지원하는 러시아의 항모전단이 영국 해협을 버젓이 통과했다. 시리아 내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영국에 시리아 정부군은 적군이다. 적군을 도우러 가는 러시아 항모가 자국 앞바다를 지나는데 멀뚱히 지켜만 보았던 것이다. 2016년 8월에는 공격용 잠수함 앰부시호가 지브롤터해협에서 훈련하다가 화물선과 충돌하는 사고로 함체가 뭉개지는 일이 있었다. 지난 10일에는 31억파운드(약 4조6000억원)를 들여 건조한 최신예 항공모함인 퀸엘리자베스호가 해상 시운전을 나갔다가 내부 격실에 물이 새서 귀항하기도 했다.



◇20C 초까지 '2강국 기준'… 해군력 2·3위 국가 합친 것보다 강해

과거의 영국 해군은 달랐다. 영국 해군은 1546년 육·해·공 3군 중 최초로 창설됐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 바다 곳곳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제압한 이후로는 세계의 제해권(制海權)을 확고히 장악했다. '팍스 브리태니커'는 영국 해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2강국 기준(two-power standard)'이란 원칙을 갖고 있었다. 세계 2·3위의 해군력을 갖춘 국가가 보유한 함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력을 운용한다는 원칙이다. 실제로 1902년 기준 영국이 보유한 전함의 총t수는 106만5000t으로 2·3위국 프랑스(49만9000t)와 러시아(38만3000t)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전함 성능도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1906년 영국 해군이 진수한 드레드노트는 속력과 함포 위력 등에서 기존의 모든 전함을 구식으로 만든 최신식 전함이었다.

영국 해군의 이런 위상은 1차 세계대전까지 유지됐다. 1910년대 영국은 세계 해군력의 34%를 차지해 2위인 독일(17%), 3위인 미국(13%)을 압도했다. 2차 대전 시작 무렵인 1939년엔 미국에 1위 자리를 넘겨줬지만, 여전히 항공모함 7척에 구축함 184척, 호위함 45척, 잠수함 60척 등 1400여척을 갖고 있었다. 하루에 900척 이상의 전함을 투입할 정도로 위력을 유지했다.



◇함선 총t수 세계 4위, 전투함 수 8위

현재의 영국 해군은 과거의 영광이 완전히 빛바랜 모습이다. 항공모함 1척, 구축함 6척, 호위함 13척, 잠수함 10척 등 보유 전함은 77척에 불과하다. 게다가 구축함 3척과 호위함 6척은 수리 중이라 실전 투입이 불가능하다. 병력도 1945년 86만1000명에서 2018년에는 3만3450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전함과 장착 무기가 현대화됐다는 점을 감안해도 초라한 수치다.

미국의 군사력 평가 전문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GFP)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영국 해군은 항공 모함 등 주요 전함 보유량 기준 세계 8위다(전체 함선 수 기준으로는 32위). 미 군사 정보 사이트 글로벌시큐리티가 올해 4월 함선의 t수를 기준으로 평가한 해군력에서는 세계 4위(66만2000t)였다. 1위인 미국(624만3000t)의 10% 수준에 불과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과거 세계의 대양(大洋)을 지배했던 섬나라는 전반적인 군사 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능력이 없는 나라가 됐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경제력과 함께 해군력도 추락

영국이 해군력을 축소한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영국은 19세기 영토를 확장할수록 그 영토를 지키기 위한 해군 방위비를 증액했는데, 방위비 증액 속도는 제국의 확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1차 대전 이후 전시 부채와 예산 부족 이중고에 시달리던 영국은 기존 전함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적 압박에 부딪혔다. 해군 전략 역시 자체 함대 충원보다는 동맹국의 해군력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30년가량 유지해온 해군의 '2강국 기준' 역시 1920년대 들어 어느 한 국가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을 유지하는 '1강국 기준(one-power standard)'으로 후퇴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패권 경쟁의 주도권이 미국과 소련에 넘어가면서 영국 해군의 위상도 급격히 추락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는 영국 해군의 자산 및 인력 감축의 큰 원인이 됐다. 당시 "외교 칵테일파티 장소로만 쓰이는 군함을 운영하기 위해 국민이 엄청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느냐"는 비판 여론이 많았다.

스테나 임페로호 사건을 계기로 영국 언론들은 "이란의 위협에 대응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너무 약한 해군"(더타임스) "전함 건조에 투자하지 않으면 걸프해역서 또 나포될 것"(텔레그래프) "한때 잘나갔던 로열 네이비의 규모가 참담한 지경"(더선)이라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정부도 위기감을 표출했다. 토비아스 엘우드 국방장관은 21일 더타임스에 "우리 해군은 세계에 걸친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기에도 너무 왜소하다"며 예산 증액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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