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우리 스스로 긋는 '제2의 애치슨라인'

조선일보
  •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입력 2019.07.29 03:17

중-일-러에 포위된 최악 환경… 北 잠수함-미사일까지 등장
미국과 틈새가 멀어지자 한국은 동네북으로 전락
6·25 발발 부른 애치슨라인… 그 교훈을 잊어선 곤란하다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비스마르크는 '지혜로운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다.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일본에 한다. 과연 우리는 강대국의 전쟁터였던 우리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국제정치학자로서 한국은 중국·일본·러시아라는 세계 최강국으로 둘러싸인 최악의 지정학적 환경을 갖는다고 강의를 해왔다. 중·러의 전략폭격기 편대가 우리 해역과 영공을 휩쓰는 것을 목격하면서 전율과 함께 생전 처음 그 말의 의미를 체험했다. 한반도는 발칸반도와 함께 세계의 화약고로 일컬어진다.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 그리고 1950년의 한국전쟁에서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갖는 강대국들이 아시아 패권을 둘러싸고 한반도를 전쟁터로 삼아 격돌했다. 우리는 항상 희생양일 뿐 어쩔 수 없었을까? 앞으로도 희생양이어야 하는가?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폭격기들이 편대를 이루어 울릉도와 독도를 관통하고 대한해협과 이어도로 이어지는 우리 해역을 헤집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러시아 조기경보기는 두 차례나 독도 영공을 침범했다. 사상 초유의 일이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다시 중·러 합작이 이루어졌다. 같은 날 북한은 건조 중인 전략잠수함을 피로(披露)했고, 이어 우리 방어망을 무력화할 수 있는 신형 탄도미사일 실험을 단행했다. 한국전쟁을 일으켰던 3인방이 대한민국을 핵으로 초토화할 수 있는 수단들을 과시하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미국은 비용을 이유로 전략폭격기를 더 이상 우리에게 전개하지 않고 있다. 키리졸브, 을지-프리덤가디언, 맥스선더, 쌍룡 등 한·미 연합 훈련이 사라진 우리 해·공역에 중·러의 전략폭격기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더욱이 일본이 우리 산업 급소를 노리는 경제 보복을 가하고 있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중·러 양국의 목적이 한·일 관계 이간질과 한·미·일 공조 흔들기였다면 크게 성공한 셈이다. 첫 공동 초계 비행의 대상으로 독도를 선택했다. 일본 스가 관방장관은 한국 전투기가 경고 사격한 것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고 극히 유감이라 했다. 피아(彼我) 구분도 무너졌다. 한·일의 극한 갈등 상황을 영토 갈등으로 확대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왜 갑자기 대한민국은 주변 강대국들의 동네북이 되었는가? 위기는 축적된 결과이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잊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따뜻한 부동항을 찾아 남진했다. 스탈린은 북한에 만족하지 않고 한반도 전역을 원했다. 미국이 눈엣가시였다. 그런데 미국은 아시아 방어선에서 남한을 제외하는 소위 '애치슨라인'을 발표한다. 남한 사회는 이념으로 사분오열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택동과 김일성을 동원하여 남침을 개시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일본 내의 기지들을 적극 활용한 미국의 개입으로 대한민국은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이후 반세기 이상 한·미 동맹으로 인해 우리는 냉엄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잊고 살아왔다. 세계 10위의 경제력과 민주화는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최악의 지정학 상황은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2의 애치슨라인을 우리 스스로 긋기 시작했다. 균형 외교라는 명목으로 한·미 동맹의 분량을 줄여가며 한·중 관계를 중시했다. 중국몽과 일대일로에 우리는 공동 운명체라 했지만, 정작 인도·태평양 구상에는 냉담했다. 남북 관계와 비핵화를 위해 한·미 연합 훈련 중단 등 한·미 동맹 제한을 우리 스스로 원했다. 일본 내 유엔사 기지 사용 문제가 우리의 사활적 안보 이익임에도 이를 냉전 구조로 여겼고, 사드 보복에 즈음하여 사실상 한·미·일 안보 협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중국에 했다. 한·미·일 공조의 기반인 한·일 정보보호협정 폐기도 운운한다. 한·미 동맹이 굳건했다면 일본이 안보를 구실로 경제 보복을 했을 리 없고, 중·러의 전략폭격기 편대가 우리 해·공역을 휘젓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공군 조종사들은 목숨을 건 극한의 차단 기동과 경고 사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칭찬해도 과하지 않다. 군다운 모습이었다. 우리 위정자들이 배워야 하는 것은 우리 병사들의 결기다. 정치가 정신 차려야 한다.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결기 가득 찬 고슴도치이어야 한다. 자주국방은 중요하지만 한계가 있다. 상대가 하나라면 죽기 살기로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중국·일본·러시아가 동시다발적으로 동네북처럼 두들기고 있는 상황에서 세 나라를 상대로 하는 자주국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지정학 환경이 최악인 까닭이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한·미 동맹이 우리의 사활적 이익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애치슨라인을 긋는 우는 절대 범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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