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중국·러시아의 도발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억지에 이어 25일 북한이 원산에서 단거리 미사일까지 발사하면서 동해가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바뀌고 있다. 한·일 관계는 과거사(징용)·경제(수출 규제)·영토(독도) 문제가 뒤얽힌 '복합 갈등'으로 가고 있다. 동북아 안보의 안전판 역할을 해온 한·미·일 안보 공조가 흔들리자 중·러가 빈틈을 세차게 치고 들어왔다. 북한만 바라보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책은 북한의 잇단 도발로 외려 뒤통수를 맞고 있다. 정부가 각종 현안에 안이하게 대처하는 사이 동해와 한반도가 동네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한반도가 주변 열강의 각축장이 됐던 구한말을 방불케 하는 총체적 안보 위기"라며 "북한만 바라보며 미·중·일·러 4강 외교를 소홀히 한 대가를 비싸게 치르고 있다"고 했다.

◇北만 바라보다 고립 자초한 韓

우리 정부는 지난달 판문점 미·북 정상 회동을 계기로 양국 실무 협상이 본격화돼 한국이 미·북 간 '촉진자'의 입지를 확보하면 중·일·러 등 주변국 외교에도 힘이 실릴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이 이후에도 한·미 연합훈련을 구실 삼아 미·북 실무 협상을 보이콧하고 우리 정부의 쌀 지원까지 거부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특히 이날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중·러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 진입하고 러시아가 한국 영공을 침범한 지 이틀 만에 이뤄졌다. 한·일 갈등으로 '한·미·일 3각 안보 협력'이 삐걱대는 틈을 타 북·중·러가 동시다발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각국이 미국을 향해 영향력을 과시하는 무대로 동해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북·중·러는 지난 2월 미·북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사실상 대미(對美) 공동전선을 구축해 연대를 강화해 왔다. 지난 4~6월엔 잇따라 양자 정상회담도 가졌다.

반면 우리 정부는 4강 외교보다는 남북 관계 개선에 치중하다 고립무원의 상황을 자초했다. 정부는 부인하지만 작년부터 북핵 해법과 대북 제재를 놓고 미국·일본과 이견을 노출해 왔다. 중국과는 사드 갈등 이후 돌파구를 찾지 못했고, 지난달 오사카 G20 회의를 계기로 추진하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방한도 무산됐다.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로 촉발된 한·일 갈등으로 한·미·일 안보 공조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일 대(對) 북·중·러 구도가 더욱 뚜렷해진 가운데 그간 동북아 정세를 논의해오던 한·미·일 3국 정상회의는 2017년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이후 개최되지 않고 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북한 올인 외교의 결과로 한·미 연합훈련이 대폭 축소·폐지되고, 우리 정부·여당을 중심으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가능성까지 언급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주변국들에 동네북처럼 얻어맞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개입 꺼리는 美, 안보 불안 이어질 듯

우리 정부는 미국이 중·러 도발과 한·일 갈등에 적극 개입해주길 기대하지만, 미국은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지난 23~24일 방한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원론적인 메시지만 낸 채 '호르무즈해협 파병'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이라는 안보 청구서를 내밀었다. 다음 달 방한하는 마크 에스퍼 미 국방부 장관도 같은 사안으로 우리 정부를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내에선 "철저하게 미국의 실익을 따지는 트럼프 행정부가 아직 한·일 문제에 적극 개입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미국은 자국의 사안이기도 했던 '사드 사태' 때도 중국을 향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주지 않았다"며 "두 동맹국 간 과거사 문제는 더욱 개입하기 어렵다"고 했다. 워싱턴 일각에선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 반(反)화웨이 전선 참여 등 미·중의 이해가 충돌하는 사안마다 줄타기와 눈치 보기만 해온 한국의 손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불안이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북·중·러가 추가 도발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은 "그간 우리 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과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만 힘을 쏟았지만, 역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 회복을 통해 북한·일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대북 외교와 4강 외교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