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정권이 만든 원치 않는 싸움, 그래도 싸움은 이겨야 한다

조선일보
입력 2019.07.19 03:12

동학군 희생 2만명, 일본군 전사는 1명… 2만 대 1의 싸움을 되풀이하자는 건가
국가 운명을 지켜낼 전략이 있기는 하나

박정훈 논설실장
박정훈 논설실장

일본발(發) 외부 공습 앞에서도 내부 비판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일본이 비겁하게도 우리의 급소를 찔러오고 있다. 19세기 말 '정한론(征韓論)'을 방불케 하는 공격이 시작됐다. 그것은 반도체 소재 몇 개를 수입하느냐 마느냐 문제가 아니다. 국가 경제와 산업 안보, 나아가 대한민국의 국가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국면이 펼쳐졌다. 그런데 정부의 상황 인식은 놀랄 만큼 안이하고 대책은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냉철한 국익 논리 대신 감정적 민족주의에 불을 지피는 정략적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전쟁은 시작됐는데 이런 정부를 믿고 있어도 되는지 덜컥 겁이 나는 것이다.

애초 이토록 커질 문제가 아니었다. 강제징용자 판결 후 후속 조치를 위한 외교적 성의를 보였으면 수습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정부는 '3권 분립'만 내세우며 손 놓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며 8개월을 방관하더니 이제 와서야 '1+1 해법'이니 '외교적 해결' 운운하고 있다. 무방비 상태로 보복 맞은 걸 천하가 다 아는데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청와대 정책실장)며 허세까지 부린다. 무능과 무책임도 모자라, 가볍고 경박하다. 이런 정부에 국가 운명을 맡겨도 되나.

일본의 기습 공격은 국제 분업의 룰을 깬 비열한 반칙이자 선전포고에 다름 아니다. 반도체 소재에 이은 '화이트 국가' 제외는 일본이 장기 전면전을 감행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1100여 종 핵심 물자의 수출 규제는 한·일 협력 체제를 깨겠다는 경제적 단교(斷交)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적성국이 아니고선 이렇게까지 적대적인 조치는 취하지 못한다. 일본의 공격엔 진검(眞劍)의 살기가 담겨 있다. 50여년 우방 관계를 배신하고 한·일 관계를 재설계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보복은 불편한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일본보다 우리가 더 많이 일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일본산 소재·장비가 핵심 산업의 숨통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일본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겠지만 우리만큼은 아니다. 산업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교력과 군사력, 금융의 힘에서 소프트파워까지 우리의 역량은 일본에 미치지 못한다. 객관적으로 절대 열세인 '비대칭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힘 약한 나라가 사는 법은 머리를 쓰는 것뿐이다. 과거 우리는 머리 잘 쓰는 전략 국가로 통했다. 아무것 없던 벌거숭이 나라가 전략을 잘 세운 덕에 이만큼 부강해졌다. 이승만의 한·미 동맹, 박정희의 경제개발이란 장대한 전략적 선택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남보다 머리 더 쓰고 더 열심히 지혜를 짜내 국력의 열세를 만회했다.

지금 이 정부에 일본을 이겨낼 어떤 전략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태가 불거지자 미국에 달려가기 바빴다. "다 파악했었다"고 하길래 무슨 대비책이라도 세운 줄 알았더니 밖에다 SOS 치는 게 고작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매달린 것을 연상시킨다는 말이 나온다. 국가 체면이 말이 아니다.

미국이라고 쉽게 우리 손을 들어줄 리 없다. 미국에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한국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크다. 트럼프는 한국을 지칭해 "미국을 싫어하는 나라"라고까지 했다. '트럼프의 푸들'이 되겠다는 아베와 '중재자론'을 내건 한국 중 누구 편을 들지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념에 빠져 한·미 동맹을 약화시키고 대한민국의 전략적 가치를 자해한 이 정부의 불찰이다. 그러나 잘못은 정부가 해도 대가를 치르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이다.

대통령은 '이순신의 12척 배' 정신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막다른 상황에 몰리지 않도록 미리 수를 쓰고 대비하는 게 책임 있는 리더다. 청와대 민정수석은 '동학 혁명'을 끄집어 냈다. 1894년 우금치 전투의 전사자는 동학군이 2만6000명, 일본군은 단 1명이었다. 또 2만 대 1의 무모한 싸움을 벌이자는 건가. 대책도 없이 기업과 국민을 전쟁터에 몰아넣는다면 그것은 정부라고 할 수도 없다.

밖에서 이길 전략은 안 보이고 국내용 프로파간다만 무성하다. 냉정하게 상황을 관리해야 할 청와대가 앞장서 '관제(官製) 민족주의'에 불을 때고 있다. 비판 여론을 향해 '토착 왜구'란 해괴한 공격을 서슴지 않으며 친일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기회 만난 듯 또다시 친일·반일로 편 가르는 정권에 반문하고 싶다. 국익 망칠 정책 오류를 비판하면 친일이 되나. 누가 나라를 팔아먹는 일본 앞잡이란 말인가.

아베의 도발을 방치한 정부의 무능 때문에 대한민국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됐다. 원치 않는 싸움이지만 시작된 이상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한다. 여기에 힘 보태지 않을 국민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의병 정신'을 외치는 정권에 묻는다. 일본의 도발을 이겨낼 복안은 무언가. 이 엄중한 위기 앞에서 국가 운명을 지켜낼 전략을 갖고 있기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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