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채보상' '동학운동' 1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청와대

조선일보
입력 2019.07.15 03:20

한·일 간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미국에 갔던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차장이 귀국길에 "1910년 국채보상운동과 1997년 외환 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했던 것처럼 뭉쳐서 이 상황(일본의 보복)을 함께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애초 기대했던 미국의 중재는 확답을 얻지 못하고 '국채보상운동'이란 110년 전 운동을 꺼냈다.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은 전남도청에서 "전남 주민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했다. 한·일 충돌을 염두에 두고 420년 전 '이순신 장군'을 불러냈다. 조국 민정수석도 동학 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노래 '죽창가'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외교 갈등 해결 대신 반일 감정에 불을 붙이려는 모습이다.

일본의 보복까지 부른 한·일 갈등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서 비롯된 외교 문제다. 정부가 미리 나서 일본 측과 대화하고 해법을 만들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일이다. '삼권 분립'을 이유로 8개월간 수수방관하면서 일을 키웠다. 정부가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해 반도체 산업과 기업들에 큰 피해가 생기게 해놓고는 100년 전처럼 일본과 싸우자고 한다. 여당의 '일본 보복 대책특위' 위원장은 "의병을 일으킬 만한 사안"이라고도 했다. 지금이 외교 갈등을 '의병'과 '죽창'으로 푸는 시대인가. 2011년 중·일이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로 충돌했을 때 중국이 공산당 조종 아래 일본 제품을 불태우는 등 감정 대응을 했다가 국제 사회의 지지만 잃었다.

민간 차원에서 일본 규탄 움직임은 일어날 수 있다. 일본이 근거 없이 '한국이 독가스 원료를 북에 넘겼다'고 하고 우리 협상단을 의도적으로 홀대한 것이 민심 악화를 불렀다. 일본산 맥주·의류 판매가 줄고 일본 여행 취소 문의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국익을 따져야 할 정권이 도리어 감정 대응에 앞장서면 갈등을 격화시키고 일본에 빌미를 줄 수 있다. 정부 차원의 반일 공세로 일본에서 반한(反韓) 감정이 더욱 확산되면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친일 청산을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3·1절 기념사는 원로 진보 학자로부터 "관제(官製) 민족주의의 전형적 모습"이란 지적을 받았다. '관제 민족주의'는 정권 실정(失政)에 대한 비판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좌파 교육감들은 학교 교가(校歌)에 친일 딱지를 붙이고, 친(親)정부 성향 노조는 항일 투쟁까지 하겠다고 나섰다. 정권 지지자들은 "냉정한 외교적 해법"을 촉구하는 지적에 '토착 왜구'라고 공격하고 있다. 감정 분출은 일시적이지만 경제 악화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민생 피해를 가져온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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