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그 후] "피묻은 청바지, CCTV도 증거 안돼"… '제주 살인의 추억' 진실은 어디에

입력 2019.07.13 17:00

2009년 첫 수사때 입건조차 못하며 미제사건
7년 뒤 재수사 착수, ‘청바지 섬유’ 새로 확보
구속까지 이르렀지만 정식 재판서 무죄 판결
法 "위법한 증거인데다 유죄 단정하기 어려워"

10년 가까이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제주 보육교사 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구속되며, 진실이 밝혀지나 싶었지만, 사건이 또다시 미궁에 빠지게 됐다. 지난 11일 법원이 용의자 박모(50)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택시기사였던 박씨는 2009년 2월 1일 새벽, 손님인 피해자 이모(당시 26세)씨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살인한 혐의(강간살인)를 받았다. 법원은 "검찰이 제출한 증거들 만으로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됐다고 볼 수 없다"며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제주보육교사 살인사건’ 피의자 박모(50)씨가 지난해 12월 제주 동부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뉴시스
’제주보육교사 살인사건’ 피의자 박모(50)씨가 지난해 12월 제주 동부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뉴시스
◇2009년 첫수사 때도 유력 용의자였던 朴씨…결정적 증거 없어 풀려나

2009년 2월 8일 피해자 이씨 시신이 배수로에서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했고 이 사건은 ‘제주판 살인의 추억’으로도 불렸다.

초동수사 때 경찰은 이씨가 실종되기 직전 남자친구와 다툰 뒤 택시를 탔다는 정황을 토대로 제주 택시기사 5000여명을 전수(全數)조사했다. 통신·운행기록 등을 통해 당시 박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직접 증거를 찾지 못한 데다 이씨 사망 추정 시점인 2월 7~8일 사이 박씨가 범행장소 부근에 없었다는 것이 확인돼 경찰은 박씨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면서 자칫 ‘미제’로 남을 뻔 했지만, 제주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이 2016년 수사를 재개해 각종 새로운 증거를 확보했다. 재수사 과정에서 나온 핵심 증거 중 하나가 ‘혈흔 묻은 청바지’다. 이 청바지는 이미 앞선 수사 때 경찰이 박씨가 살던 모텔을 압수 수색하면서 확보했던 증거물이다. 9년 사이 과학수사 기법이 발전해 사건 당시에는 확인할 수 없었던 미세섬유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숨진 이씨의 치마와 가방에서 박씨의 청바지에 포함된 파란색 면섬유와 유사한 섬유가 검출됐다고 밝혔다.

사망시점도 다시 되짚어봤다. 국내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동물 사체 부패실험’을 했다. 이씨가 사망 당시 무스탕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돼지 사체에 무스탕을 입혀 부패 정도를 측정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농수로와 무스탕이 이씨 시신의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늦췄다고 분석했다. 이씨의 사망 시점은 2009년 2월 1일 새벽 3시부터 사흘 이내로 다시 추정됐다. 기존 사망 추정시각인 2월 7~8일보다 앞당겨졌다. 경찰은 이로써 박씨의 완벽했던 알리바이도 무너트릴 수 있었다.

경찰은 사건 당시 박씨의 이동경로로 파악된 CCTV 영상 등을 보강해 구속영장을 다시 신청했다. 법원은 작년 12월 21일 "범죄혐의를 소명할 증거가 추가된 점을 고려했다"며 박씨에 대한 영장을 발부했다.


지난해 1월 29일 이씨가 살해된 정확한 시점을 알기 위해 국내 최초로 동물 사체 부패 실험이 진행된 모습. 이씨가 사망 당시 입은 옷과 같은 재질의 무스탕을 입은 돼지가 이씨의 시신이 발견된 제주 애월읍 고내봉 근처 배수로에 놓여 있다. /제주지방경찰청 제공
지난해 1월 29일 이씨가 살해된 정확한 시점을 알기 위해 국내 최초로 동물 사체 부패 실험이 진행된 모습. 이씨가 사망 당시 입은 옷과 같은 재질의 무스탕을 입은 돼지가 이씨의 시신이 발견된 제주 애월읍 고내봉 근처 배수로에 놓여 있다. /제주지방경찰청 제공
경찰, 영장 없이 압수수색…法 "혈흔 묻은 청바지 증거능력 없다"

하지만 1심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법원은 먼저 청바지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찰이 청바지를 입수한 과정이 위법하게 이뤄졌다는 이유였다.

압수 수색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지만, 2009년 당시 경찰은 ‘영장 없는 압수 수색’을 했다. 수사 당시 박씨는 다른 횡령 사건으로 교도소에 구속수감 중이어서 증거 인멸 우려가 없는 등 경찰에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경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판부는 "경찰이 압수한 박씨의 청바지는 영장주의를 위반해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에 해당한다"며 "만약 압수 수색이 필요했다면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영장을 발부받아 박씨의 거주지를 수색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영장을 받지 못할 긴급한 사유가 없었음에도 영장 없이 수색을 벌이고 청바지를 압수했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어 "청바지에서 검출된 미세섬유와 이를 분석한 결과 역시 모두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인 청바지에서 나온 2차적 증거로 증거능력이 없다"며 "강간살인죄 같은 중대범죄 수사를 위해 필요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영장 없는 압수 수색'은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국과수 감정 결과 청바지에 묻은 혈흔은 이씨와 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2009년 경찰이 제주 보육교사 피살사건 현장 감식을 벌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2009년 경찰이 제주 보육교사 피살사건 현장 감식을 벌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이씨 몸에서 나온 박씨 옷 성분..."대량생산 섬유, 박씨로 단정 못해"

법원은 설령 청바지에서 나온 미세섬유가 증거로 인정된다 해도 박씨의 유죄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법정에서 검찰은 이씨의 몸에서 나온 박씨의 옷 성분 등을 근거로 이씨가 박씨의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씨가 제3자가 운전한 차량이나 택시에 탔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봤다.

국과수 감정결과에 따르면 이씨의 몸에서 나온 옷 성분 중 박씨의 옷 성분과 유사한 부분은 ‘진청색 면섬유’뿐이었다. 그러나 이 성분은 대량 생산되는 흔한 섬유여서 반드시 박씨 옷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또 이씨 몸에서 검출된 나머지 섬유들은 모두 박씨, 이씨 옷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검찰은 범행 후 이동경로로 추정되는 도로 근처에 설치된 CCTV에 찍힌 영상 속 차량이 박씨의 택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CCTV 영상 및 분석결과만으로는 영상 속 차량이 박씨의 택시라고 인정할 수 없다"며 "또 공소사실에서 전제한 범인의 이동경로 중간에 도로가 많아 범인이 수사기관이 추정한 이동경로대로 이동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CCTV 영상은 해상도가 떨어져 차량의 차종과 색상을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인 점도 박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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