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대사 사퇴 쇼크… "트럼프엔 아부만이 살길" -CNN

조선일보
입력 2019.07.12 03:01

트럼프 비판했다 물러나자, 워싱턴 외교관들 혼돈과 공포

트럼프 대통령(왼쪽), 대럭 대사
트럼프 대통령(왼쪽), 대럭 대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요하고 노골적인 공격에 미국의 최대·최강 우방이자 혈맹(血盟)인 영국 대사가 사임하면서 워싱턴 외교가가 얼어붙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킴 대럭 주미 영국 대사가 자신과 미 행정부를 "서투르고(inept), 불안정하고(insecure), 무능하다(incompetent)"고 평가한 외교 전문을 본국에 보낸 사실이 드러나자 대럭 대사에 대해 "우스꽝스럽고(wacky) 아주 멍청하다(very stupid)"면서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타국(他國) 대사의 사임을 압박한 것이다.

대럭 대사도 트럼프의 압력 때문에 사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밝혔다. 10일(현지 시각) 공개된 그의 사퇴 서한에는 "현재 상황은 내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적혀 있다.

대럭 대사의 사임 소식에 워싱턴 외교가는 비상이 걸렸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영국 대사가 사임하면서 본국에 솔직한 평가를 제출해온 워싱턴 외교관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고 전했고, 뉴욕타임스(NYT)는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될 수 있었다"는 한 외교관의 발언을 전했다.

이번 사건의 여파가 각국의 일반적인 정보 수집과 보고 활동을 옥죄는 결과를 낳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만으로 사퇴까지 이른 일련의 과정이 외교관들의 운신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한 유럽 국가 외교관은 WP에 "나도 비슷한 전문을 보낸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솔직히 대럭 대사에게 일어난 일로 크게 충격받았다"고 말했다. 다른 익명의 외교관은 "앞으로 본국에 보고할 때 얼마나 솔직히 써야 하는지에 대해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 이 같은 워싱턴 외교가 분위기에 대해 CNN은 "외교관들 사이에서 '이제 아첨만이 살길'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했고, 폴리티코는 "이번 사건은 전 세계 외교관들에게 자신들이 언제든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오싹한 메시지를 보낸다"고 전했다.

외교관들이 주재국 국가 원수를 평가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2010년 유출된 위키리크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외교 전문에서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벌거벗은 황제'라 묘사했고,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선 '배트맨 푸틴의 로빈(조수)'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국무부나 재무부, 의회 등 공식 라인이 아닌 사위 재러드 쿠슈너, 딸 이방카 선임보좌관에게 많은 권한을 주면서 워싱턴 외교관들의 상황은 과거보다 훨씬 나빠졌다. NYT는 "워싱턴의 외교관들은 요즘 자신들이 블랙홀에 살고 있다고 묘사한다"면서 어두운 블랙홀에 있는 것처럼 외교관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에 접근할 수 없는 어둠 속에 놓였다고 전했다.

NYT에 따르면 작년 12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이 시리아에서 철수한다고 밝혔을 때 최고 동맹국인 영국의 대럭 대사는 어떤 정보도 사전에 듣지 못했다고 한다. 영국군은 미군과 함께 시리아에서 공동 작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뉴스를 통해 이 같은 결정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란 핵협정 탈퇴 당시에도 유럽 각국에 해당 정보는 미리 제공되지 않았다.

각국의 대미(對美) 외교가 지금까지보다 더 저자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CNN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 대사가 물러나도록 압력을 행사한 일은 최고 동맹국에 굴욕을 안겨줬다"며 "미국과 강력한 우호 관계는 대통령에게 아첨하는 것에 달렸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전했다.

한편 대럭 대사가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전날 총리 후보 TV 토론에서 대럭 대사에 대한 지지 입장을 유보한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에 대해 영국 내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다. 존슨 전 장관은 '총리가 되면 대럭 대사를 경질할 것이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하며 오히려 대럭 대사 때문에 트럼프가 피해를 봤다는 취지로 답했다. 앨런 덩컨 영국 외무차관은 "존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탁월한 외교관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비판했으며, 에밀리 손베리 노동당 예비내각 외무장관은 "존슨의 한심한 대응이 우리나라를 망신시켰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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