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아베의 일본판 대국굴기

입력 2019.07.12 03:15

20년 준비한 아베의 경제전쟁 '戰後 레짐' 탈피 위한 신헌법
전초전이 對韓 무역 보복… 시간은 우리편 아냐

성호철 산업2부 차장
성호철 산업2부 차장
2014년 10월 일본 가나가와현에 있는 사가미오노시(市)의 분주한 취재 현장엔 묘한 공기가 돌았다. 이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 발표가 예정됐는데 일본 한 시민단체가 유력 후보에 올랐다. 일본 주요 신문과 방송국 취재진 수십 명이 바삐 움직였고 방송 카메라는 '라이브(Live)' 표시를 화면에 띄우고 생중계했다. 하지만 잔칫상을 기대하는 흥분은커녕 냉랭함마저 느껴졌다. 평화상 수상자로 파키스탄의 10대 인권운동가가 선정되고 이 시민단체가 탈락하자마자 TV 라이브는 서둘러 끊겼다. 일본 특유의 "탈락했지만 일본인이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하다"는 자기 위안 보도도 없었다. 일본 취재진의 뒷모습에선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이유는 노벨 평화상 후보인 이 단체의 이름이 '헌법 9조에 노벨 평화상을'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 보유를 금지한 일본헌법 9조(평화헌법)에 평화상을 달라는 시민운동이다. 이 운동이 노벨 평화상에 선정됐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헌법을 대표해 아베 신조 총리가 오슬로의 시상대에 서는 주인공이 된다. 당시 일본엔 '아베 총리를 망신 주려는 메이와쿠(민폐)'라는 비판 여론이 비등했다.

한국에선 아베 총리의 '정상국가론'이 일부 극우의 지지만 받는다고 믿지만 일본 여론이 딴판이 된 건 벌써 오래전이다. 아베 총리는 20여년 전부터 2차 세계대전의 결과물인 평화헌법에 억눌린 비정상적인 일본을 헌법 수정을 통해 제자리로 돌리자고 했다. 그는 대중 앞에 설 때마다 '자위대 아빠 이야기'를 한다. 중학생 아들이 자위대 장교인 아빠한테 눈물을 글썽이며 '아빠는 위헌(違憲)이래'라고 말했다는 스토리다.

지난 5월 헌법기념일에 아베 총리는 "2020년에 신(新)헌법을 실현하겠다"며 "선두에 서서 책임지고 밀어붙이겠다"고 말했다. 일본 전문가 상당수는 "이번 일본의 경제 보복은 헌법 수정 강행에 앞서 꼭 끊어내야 할 과거 굴레를 돌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전후 레짐(체제)의 탈피'인 신헌법 제정을 위해선 종군위안부·징용근로자 등 일제강점기, 2차 세계대전과 같은 과거사와 연관된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경제 보복이 전후 세대인 아베 총리(1954년생)의 오랜 꿈을 이루는 전초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6개월 넘게 100가지 넘는 보복 카드를 준비했다"거나 "아베가 골프장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 앞에서 구르는 망신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미국을 우군으로 만들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 정부의 WTO 제소와 같은 대응에 일본 주요 인사들이 한목소리로 "전략 물자의 해외 유출을 관리하는 건 자유무역과는 상관없다"고 맞대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허둥지둥이다. 일본이 한국 주력 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를 콕 집어, 일본산(産) 소재의 수출을 사실상 막았는데도 정부 안팎에선 "이달 21일 치러질 참의원 선거에 쓰려는 일회용 카드이니 조금 기다리면 지나갈 일"이라든가, "한·일 대립을 싫어하는 미국이 예전처럼 나서주면 해결될 문제 아니냐"는 인식 수준이다. 이런 인식이다 보니 정부·여당의 아이디어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개발에 매년 1조원 수준을 집중 투자한다'는 국산화 대책이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수십조원씩 영업이익을 내는 우리가 1조원이 없어 일본산 핵심 소재에 끌려다니겠느냐"며 실소했다.

안타깝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일부 진보 측 인사들이 아무리 고종을 개혁 군주라 미화해도, 그는 제국주의 침탈을 못 막은 무능한 통치자다. 부디 문재인 대통령은 서민을 사랑한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신(新)경제 제국주의를 이겨낸 냉정한 지략가로 기록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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