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시간 26분 걸립니다' 여기가 응급실 맞습니까

입력 2019.07.11 01:45

文케어 뒤 빅5병원 응급환자 급증

10일 오후 2시쯤 환자들로 붐비는 서울성모병원 응급실 앞 전광판에 '접수부터 응급 진료 종료까지 평균 13시간 26분' '입원까지 기다리는 시간 20시간 25분'이라는 숫자가 떴다. 전날 밤 9시엔 이 숫자가 각각 '9시간 4분' '13시간 23분'이었다. 이건 평균일 뿐 "응급실에서 기다린 지 24시간이 넘었다"는 이도 있었다.

이곳뿐 아니다. 지난 8~10일 취재팀이 돌아본 빅5 병원(상위 5개 대형 종합병원) 응급실은 어느 곳이나 환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김호준 순천향대 응급의학과 교수는 "정상적인 경우라면 2~3시간 이내에 진료, 입·퇴원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구급차 타고 와도 진료 못합니다
구급차 타고 와도 진료 못합니다 -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응급실 입구에 '빈 병상이 없어 현재 구급차로 내원해도 진료를 못하고 있다. 타 병원 진료를 권고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임현경 인턴기자
문재인 케어 이후 응급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상황 변화
빅5 병원은 삼성서울병원·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서울성모병원·세브란스병원이다. '문재인 케어'로 건강보험 대상 항목이 대폭 늘고 의료비 부담이 줄어들면서, 이 빅5 병원 응급실 환자가 2017년 23만6000명에서 지난해 26만5000명으로 1년 새 3만명 가까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10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국회 김명연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다.

의료계 전문가들은 "문재인 케어로 MRI 등 건보 대상 항목이 늘어난 데다, 과거 특진비라 불리던 선택진료비를 폐지하면서 대형 병원 문턱이 낮아진 것과 무관치 않다"고 했다. 이달부터 응급실에서 초음파 검사, 독감 간이 검사를 하는 것도 건보 적용 대상이 됐다.

상위 5개 대형 병원 응급실 환자 수
이에 따라 대형 병원 쏠림 현상이 갈수록 심해져, 그 여파가 응급실까지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용 부담이 적으니 급환이 아닌데도 무조건 대형 병원을 찾는 사람이 늘고, 그중 상당수가 외래 예약 순서를 기다리는 대신 응급실을 통해 바로 입원하거나 진료를 받으려 드는 것이다.

지난봄 한 빅5 병원 응급실에 아랫배와 골반 통증을 호소하는 60대 여성이 왔다. 고열 증세도 보였다. 진단 결과, 자궁 안에 농이 가득 찬 농 자궁증이었다. 자궁을 적출하거나, 농을 빼내는 응급 수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곳 응급실은 중증과 경증 환자가 뒤섞여 초만원이었다. 다른 병원을 알아보고 이송하는 와중에 환자는 끝내 숨졌다. 제때 응급치료를 받았으면 생존율이 높은 질환인데 사망까지 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 응급실이 경증 환자들로 붐벼서다. 실제로 취재팀이 만난 빅5 병원 관계자들은 "하루 응급실 이용 인원의 3~20%가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우리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 예약 없이 외래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기다렸다 다시 오라"는 말을 들은 환자가 '오늘 꼭 진료받고 싶다'며 응급실로 밀려든 경우도 5~10% 정도 된다고 했다.

서울대병원 응급실 관계자는 "밤보다 낮에 응급실이 더 붐빈다"고 했다. 8일 오후 서울대병원 보호자 대기실에서 만난 환자복 차림의 임모(72)씨는 "응급실 안에 간이침대와 의자가 부족해 보호자 대기실에서 링거를 꽂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입원 대기에 20시간 25분
입원 대기에 20시간 25분 - 10일 오후 서울성모병원 응급실 내 보호자 대기실에는 '응급실 기준 병상 대비 혼잡도 124%' '응급실 평균 체류 시간 13시간 26분' 등 현황이 적혀 있다. /오종찬 기자
빅5 병원 중에는 응급실 혼잡도가 120% 안팎을 오가는 곳도 있다. 9일 오후 3시쯤 찾아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응급실 앞에 '빈 병상이 없어 현재 구급차로 내원해도 진료를 못 하고 있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한 빅5 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빅5 병원에 입원하려면 최소 1~2주일 기다려야 하니까, 일부 환자가 응급실을 '빨리 입원할 수 있는 통로'로 이용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했다. 지방 거점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서울 빅5 병원 입원실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대신 구급차를 타고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빅5 병원 응급실에 와서 "나는 여기 입원해야겠다"고 하는 경우다. 여러 대형 병원을 다 돌아보겠다며 쇼핑하듯 응급실 도는 사람마저 생겼다.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임상조교수는 "모든 환자들이 굳이 '빅5'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되는데, 작은 병원에 가나 빅5 병원에 가나 비용이 거의 차이가 없으니 그쪽으로 몰린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응급실이 북새통이 되면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진짜 급한 환자들이다. 윤준성 서울성모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급하지 않은 환자들로) 응급실이 복잡해지면 의료진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응급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자칫 놓칠 수 있다"고 했다.

8일 오후 4시 서울대병원 응급실 접수대 앞에서 만난 환자 보호자 박모(65)씨는 "항암 치료를 받고 있던 딸이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져 구급차를 타고 왔는데, 3시간 30분을 기다린 뒤에야 진료를 받았다"고 했다. 박씨는 "우리 딸은 정말 급한데,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환자들이 여기 왜 이렇게 많냐"면서 "저런 사람들이 왜 동네 병원 안 가고 큰 병원 응급실에 오는 거냐"고 했다.

병원 관계자들은 "급하지 않은 게 눈에 뻔히 보이는 환자라도, 병원 입장에선 그냥 돌려보내기 힘들다"고 했다. 한 빅5 병원 관계자는 "환자의 차트를 살펴보는 데 5분, 입원이 어렵다고 설득하는 데 20분, 다른 병원 알아봐서 보내는 데 20분씩 총 40~50분이 걸린다"고 했다. 설득해도 환자가 "나는 입원할 때까지 기다려보겠다" "보호자가 오면 보호자한테 설명하라"고 버티면 어쩔 도리가 없다.

의료진이 환자를 그냥 돌려보냈다가 만에 하나 큰 병이라 나중에 "당신들이 돌려보내서 병이 중해졌다"고 항의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측면도 있다.

빅5 병원은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어려운 환자가 최고 수준의 치료를 받기 위해 오는 '최종 종착지'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에선 그 반대로 빅5 병원이 다른 병원으로 환자를 실어보내는 상황이 벌어진다.

보건복지부가 국회 김명연 의원에게 낸 자료를 보면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의 경우 최근 3년간 5.2%의 환자를 다른 병원 응급실로 보냈다. 환자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아서 다른 병원에 보낸 경우가 많지만, '당장 응급처치·수술 여력이 없어서' 다른 병원에 보낸 환자도 있었다.

빅5 병원 응급센터 P 교수는 "경증과 중증이 뒤섞여서 제대로 처치를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며 "정부가 중증 아니면 대형 병원 응급센터에 못 오게 하는 법이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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