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백성은 세상 일 알려 말고 忠孝하며 살거라"

입력 2019.07.10 04:49 | 수정 2019.09.01 11:22

[172] 서점 없는 나라 조선과 책쾌(冊儈)들의 대학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서기 1771년 6월 2일, 양력 7월 13일 여름 아침이었다. 태양 볕 아래 경희궁 중간문인 건명문 앞에는 남정네들이 우글거렸다. 사내들은 모조리 발가벗고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아침부터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거의 죽게 된 자들이 100명 가까이 되었다. 자빠져 있는 사내들은 '책쾌(冊儈)'와 '상역(象譯)'이다. 책쾌는 서적 외판 상인이고 상역은 통역관이다. 건명문 앞에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가 앉아 있었다. 영조는 정복 차림인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닷새 전 영조는 책쾌 다섯을 귀양 보내고 둘은 목을 잘라 용산 청파교(靑坡橋)에 매달아버린 터였다. 이날 아침 회의에서 영조는 이리 내뱉었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내 마음이 백 척 아래 내려앉으니 세상사 다 뜬구름이로다."(1771년 6월 2일 '승정원일기') 248년 전 찌는 여름 아침, 금속활자와 훈민정음의 나라 조선에서 벌어졌던 서적 외판원 대학살극 이야기.

훈민정음의 탄생

전(前) 왕조 고려가 물려준 금속활자를 보유한 조선에 문자가 탄생했다. 1443년 음력 12월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같은 집현전 정5품 이하 20, 30대 신진 학자들을 부려서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이다. 맏아들 동궁(문종)과 둘째 아들 수양대군, 안평대군 같은 혈족도 함께였다. 두 달 뒤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해 집현전 중진 학자들이 뒤늦게 집단 상소를 올렸다.

"넓게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하급 관리)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는 언문에 동궁께서 사려를 허비하고 있다." 세종이 답했다. "전에는 '불가할 것 없다'고 하더니 말을 바꾸는구나. 아무짝에 쓸모없는 놈들!" 세종은 상소한 이들을 하루 동안 옥에 가둬버렸다.(1444년 2월 20일 '세종실록') 이미 훈민정음 작업을 집현전 모두가 알고 있었고, 세종은 반대 여론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방해 세력을 진압한 세종은 수정 과정을 거쳐 4년 뒤 1446년 9월 29일 '바람소리와 학 울음,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 모두 표현해 쓸 수 있는'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조선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문자 소유국이 되었다.

훈민정음으로 낸 책들

재위 10년째인 1428년 10월 3일 진주 사람 김화(金禾)가 아비를 죽인 존속살인사건이 보고됐다. 세종은 '효행록' 간행을 명했다. 5년 뒤 '삼강행실도'가 출판돼 종친과 신하, 팔도에 하사됐다. 이후 세종이 염원했던 세상은 언문을 통해 '어리석은 남녀가 쉽게 깨달아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오는'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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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포천 인흥군 묘 앞 밭에 놓여 있는 묘계비(仁興君 墓界碑). 선조의 12번째 서자 인흥군 이영이 묻힌 곳을 알리는 비석이다. 비석에는 세로 다섯 줄로 한글이 새겨져 있다. ‘이 비가 극히 영검하니 어떤 생각으로라도 사람이 거만하게 낮춰보지 말라’는 내용이다. 조선 권력층은 훈민정음을 백성에게 성리학적 윤리관을 주입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 일반 대중을 위해 훈민정음으로 쓴 책은 윤리 서적과 불경, 농서(農書)가 대부분이었다. 서적 출판과 유통은 국가가 독점했다. 백성은 이 효율적인 문자로 만든 책을 읽을 방법이 없었다. /박종인 기자

방해 세력을 옥에 가두던 그날 세종이 말을 이었다. "정창손이 말했다.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언문으로 번역해도 사람 자질 문제이지 본받지 않을 거라고. 이치를 아는 선비의 말이 아니다." 정창손은 그 자리에서 파면됐다. 정창손은 세종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다.

세종 사후 1490년 성종 때 마침내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출간됐다. 효자, 충신, 열녀 각 35명을 그림과 한자, 그리고 언문으로 소개한 책이다. 사대부들과 간통 행각을 벌인 어우동 사건이 계기였다. 세간에 잘 알려진 '새끼손가락 잘라 피를 먹여 아비 살린 아들'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아녀자' 이야기가 다 이 책에 들어 있다. 조선 정부는 삼강행실 언해 작업을 경국대전에 규정해 모범적인 백성을 포상하라고 규정했다.('경국대전' 예전 장권조) 사림파가 권력을 잡았던 중종 때는 한 번에 2940질을 인쇄해 전국에 뿌렸다.(1511년 10월 20일 '중종실록')

1481년 두보의 시를 번역한 '두시언해'가 출간됐다. 과거시험에 필수적인 '표준 번역' 교과서였다. 맹자언해를 비롯한 '사서언해(四書諺解)'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경서들은 위 사진에서 보듯,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 아니었다. 한문은 그대로 둔 채 한국어 어순으로 정렬한 책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자를 모르는 백성은 읽을 수 없는, 표준 해석을 위해 사대부 지식인이 찾아 읽는 전용 교과서였던 것이다. '삼강행실도 언해'가 순수 언문으로 돼 있는 반면, 언해 경전은 백성들이 접근할 방법이 없는 닫힌 책들이었다.

국가가 독점한 출판과 유통

성리학적 윤리를 담은 책들은 모두 국가에서 편찬하고 출판하고 유통시켰다. 공식적으로 책을 사고파는 민간 서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책 매매는 성리학에 반하는 상업 행위였다. 유학자에게 필요한 책은 국가에서 금속활자나 목판으로 찍어 '나눠줬다'. 선비를 제외한 백성은 그 유통 과정에 철저하게 소외됐다. 대신 농서(農書)와 의서(醫書) 언해를 읽었다. 성리학적 세계를 지탱하는 농업을 진흥하고, 그 종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번역서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읽을 거리가 언문 계고 표지였다. 서울 노원구에는 '이윤탁 한글 영비'(1536년)가 있다. 무덤 옆에 있는 이 비석에는 '신령한 비석이니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화를 입는다.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린다'라 새겨져 있다. 이미 16세기에 언문이 퍼졌다는 뜻이다. 문경새재에는 18세기 표기법으로 '산불조심'이라 새긴 표석이 있다. 경남 진주 의곡사에는 한문을 음독해 새긴 비석(1916년)이 있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선조의 열두 번째 왕자 인흥군 묘에는 묘역을 알리는 묘계비(1686년)가 서 있다. 왼쪽 옆구리에는 '이 비가 극히 영검하니 어떤 생각으로라도 사람이 거만하게 낮춰보지 말라'라고 새겨져 있다. 인흥군 아들인 명필 낭선군 이우의 글씨다.(묘계비는 밭 한가운데에 아무 안내판도, 난간석도 없이 6·25 때 탄환 자국을 안고 서 있다. 밭주인은 "살기도 불편하고, 문화재 보호도 않는 시청도 한심하고"라 했다.)

그렇게 백성은 충성과 효도를 배우고, 사서삼경은 까막눈으로, 살았다. 산불 조심하고 남의 묏자리 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살았다. 이제 1771년 여름날 경희궁으로 돌아가 본다.

책쾌의 대학살

서점 없는 나라에서 서적 공급은 책쾌(冊儈)가 책임졌다. 외판원들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책이 필요한 사람에게 책을 공급해주는 직업군이었다. 사대부들은 책쾌를 통해 필요한 책을 구입했고, 살림이 궁할 때는 몰래 팔았다. 그런데 1771년 여름 그들이 참극을 당한 것이다.

왼쪽은 선조 때 만든 ‘맹자 언해’. ‘數촉罟고를 不불入입洿오池지면 魚어鼈별를 不불可가勝승食식也야’라고 토를 달고 ‘數촉罟고를 洿오池예入입디 아니하면 魚어鼈별을 不가히 이긔여 食식디 몯하며’라고 풀이했다. 이를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못 넣게 하면 물고기와 자라가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날 것입니다’라고 읽을 수 있는 백성은 얼마나 됐을까. 경전 언해는 철저하게 성리학 지식인을 위한 작업이었다. 오른쪽은 문경새재에 있는 18세기 한글 ‘산불 조심’ 비석.
왼쪽은 선조 때 만든 ‘맹자 언해’. ‘數촉罟고를 不불入입洿오池지면 魚어鼈별를 不불可가勝승食식也야’라고 토를 달고 ‘數촉罟고를 洿오池예入입디 아니하면 魚어鼈별을 不가히 이긔여 食식디 몯하며’라고 풀이했다. 이를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못 넣게 하면 물고기와 자라가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날 것입니다’라고 읽을 수 있는 백성은 얼마나 됐을까. 경전 언해는 철저하게 성리학 지식인을 위한 작업이었다. 오른쪽은 문경새재에 있는 18세기 한글 ‘산불 조심’ 비석.

그해 5월 전 지평 박필순이 "'강감회찬'이라는 청나라책에 조선 왕실을 비방하는 글이 있다"고 상소를 올렸다. 전주 이씨 왕실이 고려 역적 이인임 후손이라고 돼 있다는 것이다. 영조는 책을 읽은 자는 물론 유통시킨 자들을 전원 색출하라 명했다. 결국 책을 청에서 사들여온 사신 3명은 섬으로 유배됐다. 그리고 책을 사고판 사대부는 양반적에서 삭제하고 무기금고를 예고했다.(1771년 5월 23일 '승정원일기') 다음 날 다시 전원체포령이 떨어졌다. 과거 합격생 가운데 책을 읽은 자는 합격을 취소하고 수군으로 보내라 명했다. 26일에는 책을 신고한 박필순도 귀양을 보냈다. 27일에는 책 상인 무리를 전원 체포해 곤장을 치고 수군으로 보내라 명했다. 다음 날 책 저자 '주린'과 이름이 같은 전 참판 '엄린'의 이름을 '엄숙'으로 개명시켰다. 그리고 6월 1일 '강감회찬' 외에 '청암집'이라는 책이 또 적발됐다는 보고에 다음 날 경희궁으로 책쾌 무리를 체포해온 것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100명이니, 장안에 있는 책쾌란 책쾌는 전원 검거된 날이었다. 예문관 제조인 채제공이 "알고 보니 '청암집'은 존재하지 않는 책"이라고 보고했지만, 영조의 분은 가라앉지 않았고 이후에도 책쾌 금령은 철회되지 않았다.

1880년 파리외방선교회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한불자전' 500권을 찍었다. 활자는 도쿄 히라노활판제조소(平野活版製造所)에서 제작했다. 최초의 한글 납활자다.(류현국, '동아시아에 있어 서양인 선교사들이 개발한 한글활자') 1883년 박영효가 일본에서 납활자를 들여와 국영 인쇄소 박문국을 설립했다. 민간 서점이 본격적으로 생겨난 때는 1905년 을사조약 직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지식이 전무해 국가 존망이 자기와 상관없는 줄 알기에 나라가 위태롭다'고 각성을 촉구하면서부터다.(강명관, '근대계몽기 출판운동과 그 역사적 의의')

서점 없는 나라와 무서운 백성

각성 없는 그 시대를 허균은 이렇게 묘사했다. "항상 눈앞 일에 얽매여 법이나 지키며 윗사람에게 부림당하는 사람들을 항민(恒民)이라 한다. 항민은 두렵지 않다. 두려워해야 할 백성은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시대적 변고가 있으면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호민(豪民)'이다. 호민이 팔을 휘두르며 소리 지르면 항민도 호미, 고무래, 창자루 들고 따라와 무도한 놈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세금 5푼을 내면 4푼은 간사한 개인에게 흩어진다. 관청이 가난해 일만 있으면 1년에 세금을 두 번씩 매기고 수령들은 마구 거둬들인다. 그럼에도 위에 있는 사람은 태평스러운 듯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허균, '호민론(豪民論)',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11권 '문부(文部)')

왜 호민이 없었는가. 조선 정부가 호민이 될 여지를 없앴기 때문이다. '천지간 흘겨볼' 여유를 없애버리고 농사나 짓고 충성과 효도를 다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효율적인 문자를 가진 나라 백성은 그렇게 살았다. 1771년 찌는 여름날 경희궁 궁내에서 발가벗긴 채 죽음을 기다리던 책장수들 운명이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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