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오후 6시면 사무실 컴퓨터를 꺼버리는 식으로 한국 노동시장은 점점 경직되어 가고 있다. '유연한 고용'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인 승차 공유조차 매듭이 엉킨 상태다. 선진국 고용 환경은 정반대다. 유연한 고용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긱 경제(gig economy)'가 빠르게 확산 중이다. '긱 경제'는 근로자가 한 직장에 매이지 않고, 시시때때로 이동하는 경제 현상을 일컫는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일자리 플랫폼들이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2027년쯤 미국 경제활동인구의 절반이 긱 경제 형태로 일하리라고 전망한다. 긱 경제는 '일하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꿔가고, 승자와 패자는 누가 될까. 우버(Uber)·리프트(Lyft) 같은 승차 공유를 비롯해 톱탤(TopTal)·그래파이트(Graphite) 같은 고숙련자 일자리 플랫폼이 모인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찾아 긱 경제의 현장을 탐험했다.
①카를로스 에르난데스(40): 미국서 일하는 온두라스 앱 개발자
"저는 앱 개발자입니다. 지진·날씨, 경찰서 위치를 알려주는 앱을 개발했지요. '쌈박한' 기술이라고요? 온두라스에선 꼭 그렇지 않았어요. 앱 개발 회사가 많지 않거든요. 몇 년 전 미국의 온라인 일자리 연결 플랫폼 '톱탤'을 알게 됐습니다. 앱 개발자를 구하는 미국 정보기술(IT) 회사에 프리랜서로 연결해준다고 하더군요. '큰물에서 실력 한번 발휘해볼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았어요. 영어·프로그래밍과 기술 적용, 앱 프레젠테이션 등 4단계에 걸친 시험을 봐야 했거든요.(톱탤은 한 달 평균 700여 명을 평가하는데 합격자는 한두 명에 불과하다.) 시험을 통과하자 톱탤에 등록한 미국 회원사들이 저에게 일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수입이 열 배로 늘더군요. 지금 한 달에 약 2만달러(약 2300만원)를 법니다. 얼마간은 온두라스 고향집에서 원격으로 일을 했어요. 제가 맘에 들었는지 '라이프360'이라는 미국 회사가 저를 채용해 샌프란시스코로 아예 이사를 왔습니다. 지금도 남는 시간에 프리랜서 일감을 처리합니다. 긱 경제는 내가 원하는 일을 선택해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물론, 사회가 요구하는 기술을 갖췄기 때문이죠."
②알렉스 고스토멜스키(31): 시티그룹 나온 프리랜서 금융인
"대학 졸업 후 시티그룹에서 3년, 워싱턴DC에 있는 컨설팅 회사에서 2년을 상근직으로 일했습니다. 꽤 그럴듯한 직장이었죠. 작년 여름 그만뒀어요. 내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며 독립적으로 일하고 싶었거든요. 지금은 '그래파이트' 같은 온라인 일자리 연결 플랫폼 여러 곳에 등록해놓고 프리랜서 재무 전략가로 일합니다.(그래파이트엔 5200여 명이 등록돼 있고 이들을 약 1000개 회사가 필요할 때마다 채용해 쓴다.) 정작 해보니 시간 여유는 더 생기고 돈벌이는 비슷하더군요. 지난해엔 연간 목표 수입을 8개월 만에 채우고 나머지 4개월을 쉬었죠. 신나겠다고요? 공짜 점심은 없죠. 건강보험도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연금 같은 은퇴 준비도 훨씬 불안해졌죠. 일감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고요."
③이반(43): 페덱스 다니다 우버 기사로
"2년 전까진 택배사 페덱스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그만뒀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전업 우버 기사로 직업을 바꿨습니다.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줄 시간도 생겨서 좋고 벌이도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이 일을 평생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불만이 많아요. 승객과 운전자를 연결하는 우버가 수수료를 너무 많이 떼가요. 지난주엔 제가 350달러를 벌었는데, 수수료로 92달러를 떼갔단 말입니다! 또 우버는 운전자들을 악질 손님으로부터 보호해주지도 않아요. 우버 기사가 너무 많아지니 우버는 더욱 '갑'이 되었죠. 수수료율(이제 25%까지 올라갔어요!)은 인상되고, 운행 횟수가 늘면 '우수한 운전자'표시를 해주는 식으로 더 많이 일하라고 강요합니다. 제가 원했던 자율권이 사라져가고 있단 말입니다."
④비크람 아쇽(32): 일자리 연결 플랫폼 만든 창업자
"저는 예전에 사모펀드에서 일하면서 기업들이 전문적이면서도 유연한 인력을 많이 필요로 한다고 느끼고 고급 고용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해 쌓은 기술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꼭 필요할 때(예컨대 인수·합병 같은 일회성 이벤트)만 쓰고 싶어하는 회사가 많더라는 겁니다. 이런 회사들이 전문가들과 쉽게 연결되도록 돕는 것이 저희의 일입니다. 회사와 인력, 양쪽의 '품질'을 검증·관리함으로써 돈을 법니다.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하고 있어요. 정부도 긱 경제를 큰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프리랜서들의 복리후생을 위해 법과 인프라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탐100 다녀왔습니다]
대기업만 보는 한국 대학생… '긱 경제' 시대 준비해야
일주일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긱 경제' 일선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매번 다른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페이스북·테슬라 등 유수의 기업들에 프리랜서를 연결해주는 온라인 플랫폼 운영자들…. 이들은 하나같이 "한평생 한 직장을 다니는 시대는 오래전에 끝장났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보였고 한국에도 찾아올 미래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유명 대기업에 안착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저와 제 주변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찔한 속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평생직장을 좇는 한국 청년들이 '긱 경제'가 보편화된 세계에 적응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저도 머리를 함께 맞대고 고민하겠습니다.
☞긱 경제(Gig Economy)
1920년대 미국 재즈 공연장 주변에서 그때그때 연주자를 구해 단기 공연 계약을 맺는 것을 뜻하는 ‘긱(gig)’이라는 용어에서 유래했다. 기업이 필요할 때마다 단기 계약직이나 임시적인 인력을 고용하고 일을 맡기는 경제 형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