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일본의 경제 보복이 선거용?

조선일보
입력 2019.07.10 03:15

日, 독자 경제제재 나선 건 처음… 安保라는 공통분모도 사라져
불매운동, 반일 시위 조장은 기업과 국민을 인질로 삼는 것

정권현 논설위원
정권현 논설위원

어느 집단에서나 구성원들이 거스르기 힘든 '분위기'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일본에서는 그런 암묵적 규율이 유독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일본 작가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는 공기(空氣·구키)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일본인에게는 모든 논의나 주장을 초월해 구속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공기'의 지배라는 것이다. 어떤 '공기'가 형성되면 누가 결정을 내렸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곳이 일본이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용 3대 핵심 소재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 조치를 내린 데 대해 21일 참의원 선거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지금 일본을 짓누르는 '공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전후 일본이 특정 국가에 대해 독자적으로 경제제재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일본의 경제제재 조치는 유엔 결의안을 따랐을 뿐이다. 북한에 대해서도 유엔 제재 플러스 알파가 기본이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 원인을 미국의 경제 봉쇄 탓으로 돌리는 일본의 집권층은 경제제재에는 늘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 일본이 이번에 작심하고 칼을 빼들었다. 일본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한국을 더욱 옥죄어야 한다는 의견이 아베 총리의 개인 지지율(51%)을 훌쩍 넘는 58%로 나타났다. 20대 유권자들의 아베 지지율은 70%에 달할 정도로 열광적이다. 아베 총리는 전략물자의 북한 유출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백기를 들고 항복하라는 요구나 다름없다.

대법원이 지난해 10월 징용 피해자의 개별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것이 반세기 이상 지탱해온 한·일 관계의 근간을 뒤흔들어버렸다. 외교 조약도 최후의 결정권은 사법부가 쥐고 있다고 우기는 정부를 상대로 외교가 기능할 리가 없다. 위안부 합의 파기를 시작으로, 욱일기 배척, 레이더 분쟁 등 적폐청산식 반일 노선을 줄기차게 펼쳤다. 일본 입장에서는 합의 사항이 계속 뒤집히는데, 다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지켜질 수 있다고 믿지 않게 됐다. 과거에는 한·일 관계가 어려워도 안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하에서 그런 공통분모는 없어지고 서로 간의 약속은 무용지물이 됐다.

일본의 조치 발표 일주일 만에 문 대통령이 내놓은 반응을 보면 반일(反日) 프레임은 요지부동이다.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싸움을 걸어온 것이니, 이번 사태의 책임은 일본 측이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또한 "한국 기업들에 피해가 생기면 필요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 전면전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미국이 못 본 척 방치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은 아베의 손에 달려 있다. 일본이 한국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수단은 무궁무진하다. 한국 측이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하는 일본으로선 협상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고집을 버려야 한다. 일본의 '공기'를 잘못 읽거나 능력을 오판해서 정면충돌로 간다는 시나리오는 악몽이다. 한 여당 중진의원은 "이 정도 경제 침략 상황이면 의병을 일으켜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일으키고 반일 시위에 앞장서라는 말로 들린다. 기업과 국민들을 인질 삼아 옥쇄(玉碎)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일본 상품 불매운동은 중국에서도 안 통했다. 2012년 중국의 대규모 반일 시위 이후 일본 기업들은 소리 소문 없이 중국을 빠져나갔다. 일본의 유니클로가 중국에서 동남아 국가로 빠져나가는 데 2년이 채 안 걸렸다. 한번 각오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나라, 그게 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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