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원 20주년 생일잔치, 장차관 안 가고 취재도 봉쇄

조선일보
입력 2019.07.09 01:45

대대적 홍보 10주년 때와 달리 남북하나재단 이사장까지 불참

8일 오전 10시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이하 하나원) 앞. 가급(級) 보안 시설로 분류돼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된 탓에 평소엔 인적이 드물지만 이날은 외부 차량 몇대가 경내로 진입했다. 개원 20주년을 맞아 방문한 외빈들을 태운 차량이었다. 하지만 취재진은 접근할 수 없었다. 통일부 당국자는 "내부 행사로 간소하고 내실 있게 치르기 위해 언론 취재를 제한한다"고 했다.

통일부 산하 탈북민 정착 교육 기관인 하나원은 탈북민들에게 '남녘의 첫 보금자리'이자 '제2의 고향'이다. 1999년 7월 8일 1기 교육생 20명이 입소한 이래 총 256기 3만1000여명이 이곳을 거쳐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역대 정부는 탈북민을 '먼저 온 통일'로 부르며 하나원을 '탈북민 포용 정책'의 상징으로 홍보해왔다. 2009년 하나원 개원 10주년 등 주요 계기 때마다 통일부 장차관 등 고위 인사들이 참석하고 국내외 언론의 취재를 허용한 것도 이 같은 상징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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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20주년인데… 플래카드 하나 없는 하나원 - 8일 개원 20주년 기념식이 열린 탈북민 정착 교육 기관인 경기 안성시 '하나원' 입구는 오가는 차량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한 모습이었다. /오종찬 기자
하지만 하나원의 스무 번째 생일은 '조용히' 치러졌다. 통일부 장차관이나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차관급) 등 고위 인사는 오지 않았다. 언론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김승 전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은 "하나원이 성인(成人)이 되는 뜻깊은 날 역대 가장 초라한 생일을 보냈다"고 했다. 탈북민들 사이에선 "정부가 김정은 정권 눈치를 보느라 우리를 천덕꾸러기 취급한다"는 말이 나왔다.

통일부가 하나원 개원 20주년 행사를 최대한 '조용히' 치르고자 한 정황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언론의 취재 문의엔 "취재는 물론 기념행사 사진도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과거 개원 기념일에 맞춰 내외신 언론을 초청하고 교육 중인 탈북민 인터뷰까지 주선했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다.

참석 인사들의 급(級)도 확 낮아졌다. 과거 개원 기념식엔 통일부 장관 또는 차관,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차관급) 등이 참석하곤 했다. 2009년 개원 10주년 행사의 경우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김문수 경기도지사, 박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 이홍구·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이번엔 전·현직을 통틀어 장차관급 인사가 한 명도 없었다. 남북하나재단 사무총장(1급)이 최고위 인사였다.

특히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지난 4월 8일 취임 후 한 번도 하나원을 찾지 않았다. 역대 통일장관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취임 직후 하나원 등 산하기관들을 시찰했다. 전임 조명균 장관도 취임 닷새(2017년 7월 8일) 만에 하나원을 찾아 탈북민들을 격려했다.

탈북민들은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나원 입소 당시 기수별 대표(총무)들의 모임인 '하나총협회'의 홍성원 전 회장은 "통일부가 우리 협회에도 이번 행사를 알리지 않았다"며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소장은 "이 정부는 북한이 우선이다 보니 '먼저 온 통일'(탈북민)은 설 자리가 없다"고 했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대한민국에 왔을 때 처음 반겨준 하나원은 우리에게 고향 같은 곳"이라며 "번듯한 행사를 열어 자긍심을 갖게 하긴커녕 북한 눈치를 보느라 탈북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했다.

전직 관료들도 "통일부가 하나원의 '성인식'을 푸대접했다"고 했다.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은 "김정은 정권의 심기를 헤아리기 전에 우리 국민인 탈북민부터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손광주 전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은 "뜻깊은 개원 20주년 행사를 너무 소극적으로 치렀다"며 "북한 정권의 압제 아래 자유를 꿈꾸는 주민들에게도 부정적 메시지"라고 했다.

탈북민과 북한 인권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대해선 그동안 여러 차례 지적이 나왔다. 미 국무부는 지난 3월 인권보고서에서 "한국 정부가 북한과 대화에 나서면서 탈북 단체들은 '정부로부터 대북 비난을 줄이라는 직간접적 압력을 받고 있다'고 했다"고 밝혔다. 실제 탈북 단체들에 대한 통일부의 '탈북민 정착 사업비' 지급액은 반 토막이 났고, 국정원·경찰 예산으로 지원금을 받던 탈북자 단체들도 지원이 끊겼다. 기업 후원도 사라졌다. 상당수 탈북 단체가 자금난에 허덕이며 대리운전 등으로 '투잡'을 뛰는 실정이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현 정부는 탈북·귀순 등 북 정권이 불편해하는 이슈가 언론에 오르는 걸 극도로 민감해한다"며 "북한과의 교류·협력에 조바심을 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은폐·축소' 논란을 낳은 최근 '북한 목선의 삼척항 입항 사건' 당시 잘 드러났다.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지난달 21일 "(목선에 탄) 4명이 넘어왔을 때 사실은 그런 보도가 나가선 안 됐다"며 "그분들이 귀순 의사를 갖고 넘어왔다면 그게 보도됨으로써 남북 관계가 경색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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