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우리말 간행물은 상위 30개 중 4개뿐"

조선일보
입력 2019.07.08 04:30 | 수정 2019.07.08 10:17

한기형 成大 동아시아학술원장, 1926~1939년 출판물 현황 분석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상위 30개 출판물 중 조선어 매체는 조선일보·동아일보·매일신보·조선중앙일보 등 4종에 불과했다. 그나마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다. 나머지 26종은 오사카마이니치·오사카아사히신문 등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일본 신문이거나, 경성일보처럼 일본인이 조선에서 발간한 간행물이 '싹쓸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내용은 한기형(57·작은 사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이 일제 강점기 출판물의 검열 문제 등을 다룬 학술서 '식민지 문역'(성균관대출판부)을 펴내는 과정에서 조사됐다. 한 원장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를 일일이 뒤져 일제강점기인 1926~1939년 한반도에서 판매된 조선어와 일본어 신문·잡지 등 출판물의 매체명과 판매 부수를 구매량(판매량) 기준으로 상위 30위까지 산출했다. 수작업으로 표를 만드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다.

한 원장은 "식민지에서 시행된 신문지법·출판법은 허가제와 사전 검열제를 통해 조선인 매체의 간행을 극단적으로 제한했다"면서 "조선어 신문·잡지는 일본어 출판물들에 사실상 포위된 채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공정 경쟁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조선어 신문·잡지는 한편으로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검열에 직면했고, 또 한편으로는 봇물 터진 듯 쏟아지는 일본어 출판물과 맞서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한 원장은 "조선어 매체는 조선 안에서 고립돼 있었고, 일본인까지 독자로 포섭하는 '확장성'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편집국 전원이 일제의 강제 폐간으로 마지막 신문 제작을 마친 직후 비통한 표정으로 고별 촬영을 했다. 일제강점기 민족지들은 동요·민요 등 독자들이 투고한 시가를 싣거나 독립운동가들의 법정 공판기를 보도하는 방식으로 검열에 저항했다.

조선어 신문 검열 실태를 담은 '조선어 신문의 시가(詩歌)'도 새로운 연구 성과 가운데 하나다. 1930년 1~3월 조선·동아·중외일보 등 세 신문에 게재된 시가는 920편이었다. 조선일보 438편, 동아 296편, 중외 186편의 순이었다. 한 원장은 "당시 신문에 발표된 시가 문학의 총량이 예상보다 많았고, 독자 투고인 동요·민요의 수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면서 "조선어 신문들이 시를 짓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이 가운데 134편을 '불온 작품'으로 규정했다. 조선일보 78편, 동아 32편, 중외 24편의 순이었다. 조선·동아일보는 독립 운동가들의 법정 공판기를 보도할 때에도 피고들의 주장을 굵은 글씨의 표제문으로 지면 위에 쏟아내고, 검사 발언은 단 한 줄로 짧게 요약하는 방식으로 검열에 저항했다.

한 원장이 일제의 검열 문제를 파고든 것은 한국 근대문학이라는 자신의 전공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미국·유럽 중심의 근대 세계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식민지 문화는 위축되고 부족하고 초라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면서 "하지만 이런 열등감에 빠져서 한국 근대문학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과연 올바른지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오히려 검열로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됐던 일제강점기에도 한국 문학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고투(苦鬪)했던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시각이다.

한 원장은 한국 문학사에서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있는 대표적 작가로 염상섭·김유정을 꼽았다. 염상섭은 "일제의 검열을 의식하면서도 그 대결 속에서 한국 소설의 특별한 양식을 실험하고 발견했던 작가이자 사상가"였고, 김유정은 "유랑 매춘부를 등장시켜 여성의 참상에 주목하면서도 그 책임을 여성에게 되돌리는 사회의 공모(共謀)에서 여성을 끌어내고자 했던 페미니스트"라고 설명했다. 그는 "식민지 문학의 겉모습 뒤에는 미처 알려지지 않은 숱한 세계들이 남아 있으며 한국 문학의 성취는 아직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