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日·中·美 우리 기업들 직접 겨냥, 정부는 어디에 있나

조선일보
입력 2019.07.02 03:20

일본 정부가 반도체·스마트폰·TV 제조에 쓰이는 첨단 필수 소재 세 가지의 대한(對韓) 수출을 규제하고 나섰다. 27개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해 수출 때마다 건건이 일본 정부 승인을 받도록 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신뢰 관계가 현저히 훼손됐기 때문"이라고 말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일본 기업 자산 압류에 대한 보복임을 분명히 했다.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일본 정부가 중국의 '사드 보복'처럼 비상식적 보복 조치를 강행하고 나섰다. 정부 차원에서 협상과 조율을 통해 해결해야 할 외교 현안이 곧바로 기업과 산업 타격으로 비화되는 최악의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법원 판결을 문제 삼은 일본의 무역 보복은 자유무역 정신에 어긋나고 세계무역기구(WTO)의 통상 규범에 위배될 소지가 크다. 일본은 자국이 주관한 오사카 G20 정상회의가 '자유롭고 차별 없는 무역 환경'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한 지 이틀 만에 이에 역행하는 대한국 무역 차별을 감행했다. 수십년간 지속돼온 양국의 상호 호혜적 경제 관계를 뒤엎고 신뢰를 깨는 부당하고도 치졸한 조치다. 국제사회가 비난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 간 관계에선 도덕·규범보다 힘과 실력의 논리가 우선한다. 일본이 보복 카드로 들고 나온 3개 소재는 일본산의 경쟁력이 뛰어나 세계시장의 70~90%를 장악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절대적으로 일본 제품에 의존하는 처지여서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LG전자 등의 타격이 불가피하다. 한국 경제의 급소를 타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일본도 한국산 반도체·디스플레이 의존도가 크기 때문에 타격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승인 절차를 이유로 시간을 끌고 트집을 잡으면 피해가 없을 수 없다. 안 그래도 심각한 경기 침체로 내리막인 한국 경제에 설상가상이 될 수 있다.

일본이 반도체 분야의 보복에 나설 것이란 예상은 작년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줄곧 제기돼왔다. 하지만 정부는 아무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방관했다. 일본의 보복도 일본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지난주 외교부 장관이 "(일본이 보복하면) 우리도 가만있을 수 없다"고 했지만 말뿐이다. 실제 상황이 벌어지자 "WTO에 제소하겠다"는 것 외에 실질적 대응 조치를 내놓지 못했다.

지난 주말 중국 베이징시가 삼성·현대차 등 120여개 한국 기업의 광고판을 뜯어내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돈을 지불하고 2025년까지 광고판 운영 계약을 맺었는데 사전 설명도, 보상 약속도 없이 군사 작전하듯 심야에 철거했다. 기업들이 베이징 당국의 불법행위로 심각한 손해를 입었지만 한국 정부는 아무 대책이 없다. 2년 전 '사드 보복' 당시 중국 정부가 롯데·현대차와 관광·한류 기업들에 막무가내 보복을 가했을 때와 마찬가지다.

방한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 기업인 20여명을 초청해 "미국에 5만개 일자리를 만들어줬다"고 기업인 이름까지 불러가며 박수를 쳤다. 백악관이 미국에 투자한 기업을 중심으로 직접 초청 대상을 선정했다고 한다. 뒤집어 말하면 미국 이익에 도움 되지 않는 기업엔 관세 보복 등으로 손을 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은 한국 기업들에 중국과 거래하지 말라는 압박도 강화하고 있다.

강대국들이 한국 정부를 거치지 않고 우리 기업과 산업을 겨냥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고 압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온갖 규제와 수사로 기업의 목을 조이는 한국 정부는 자국 기업을 보호해야 할 사태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해 대일 강경 외교를 주도해 온 청와대의 입장은 "산업부에 물어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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