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늦게했더니… 내 자리는 은행장님 옆자리

조선일보
입력 2019.06.28 03:01 | 수정 2019.06.28 15:45

씨티은행, 고정석 없애기로… 보수적인 금융권에 부는 공간 혁신

서울 중구에 있는 KEB하나은행 을지로 본점 직원들은 회사에 '내 자리'라는 게 없다. 직원들은 아침에 출근해 자기 부서가 있는 층에 도착하면 입구에 설치된 대형 터치스크린 앞에 서서 자기가 오늘 앉아서 일할 자리를 손으로 눌러 고른다. 한 번 앉은 자리에는 5일 동안 앉을 수 없다. 본부장 이상 임원만 빼고 부장, 팀장 등 모두가 똑같이 자리를 옮긴다. 지난 2017년 9월 을지로 본점을 새로 만들었을 때부터 도입한 '스마트 오피스' 시스템이다. 자리를 '강제로' 섞이게 해서 직원들끼리 조금이라도 더 소통하게 만들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독려하려고 이런 구조를 만들었다. 좌석마다 놓인 컴퓨터에 로그인만 하면 자기가 전날까지 작성하던 문서나 저장한 파일 등을 그대로 불러올 수 있는 클라우드(가상 저장 공간) 시스템도 깔려 있다. 개인 소지품은 층마다 배치된 사물함에서 꺼낸다.

27일 서울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27일 서울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직원 간 자유로운 소통을 통한 업무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난 2017년부터 매일 원하는 자리를 자유롭게 지정해 앉을 수 있는 '스마트 오피스'를 도입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층마다 입구에 설치된 대형 터치 화면에서 자리를 고를 수 있다.
층마다 입구에 설치된 대형 터치 화면에서 자리를 고를 수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IT(정보기술)를 앞세운 인터넷은행, 핀테크 스타트업의 등장에 맞서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낀 금융회사들이 잇따라 업무 환경을 바꾸는 색다른 공간 전략을 짜내고 있다. 위계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기존 금융회사의 문화를 깨기 위해 사무실 칸막이를 없애거나 임원실 크기를 줄이고 조직 구조를 바꾸는 등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공간부터 바꿔야 마음가짐도 바뀐다

2년간 스마트 오피스 실험을 하면서 하나은행은 비용 절감 효과도 봤다. 하나은행이 직원들의 근무 패턴을 조사해봤더니 휴가나 출장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직원을 감안하면 전체 정원에서 85% 정도만 늘 건물 안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을지로 본점 안에 정원의 85%만큼만 자리를 만들었고 이로 인해 연간 20억~3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아낀 돈으로는 직원용 도서관이나 피트니스센터, 캡슐 수면방 등을 만들었다.

금융권의 '공간 혁신' 사례
한발 더 나아가 최근 을지로 본점 24층 한 개 층을 별도의 스마트워크센터로 만들고 있다. 특정 부서나 팀 단위가 아닌 특별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 하나금융 여러 계열사에서 온 직원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근무 공간을 꾸미는 것이다.

다른 금융회사도 공간 혁신에 분주하다. 우리은행의 경우 디지털금융그룹이 입주한 서울 남산센트럴타워 20~21층에서 스마트 오피스 실험을 한다. 부서 사이 칸막이를 없앴고, 직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색다른 회의 공간을 만들었다. 특히 회의실 이름을 직원 공모와 투표를 통해 정했다. '모다방'(모두 다 이야기해야 하는 방), '오래안되방'(오래 회의하면 안 되는 방) 등이다.

신한은행의 IT 사업을 이끄는 디지털그룹이 입주한 서울 중구 부영빌딩 16층은 IT 기업 분위기가 물씬 난다. VR(가상현실) 기기나 최신 스마트폰 등 IT 제품을 책상 바로 옆에 배치해 언제든 새 서비스를 실험해볼 수 있게 했다. 또 본부장 이상 임원 방은 크기를 기존의 절반으로 줄였고 부서장들도 칸막이가 없는 평평한 책상에서 직원들과 나란히 앉아 일한다.

임원 방 없애고 CEO가 수시로 직원들과 토론

변화는 직위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씨티은행의 경우 내년 4월 서울 종로구 씨티뱅크센터 빌딩으로 본점을 옮기면서 이 건물 전체를 하나은행 을지로 본점 같은 스마트 오피스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은행장이나 임원들이 별도의 방을 갖지 않기로 했다. 인터넷은행인 '카카오뱅크'는 이미 은행장실이 따로 없다.

신한생명은 지난 4월 성대규 사장이 취임 후 사무실 옆에 이노베이션센터를 설치했다. 회사 전체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부서인데 사장이 직접 이 사무실을 드나들며 수시로 토론하겠다는 취지다. NH농협은행 이대훈 은행장은 서울 양재동에 있는 핀테크 지원센터인 '디지털혁신캠퍼스'로 일주일에 한 차례 출근한다. 이곳에 출근했을 때 직함도 은행장에서 '디지털 익스플로러(탐험가)'로 바꿔 부르고 있다. 은행장이 혁신 방안을 챙긴다는 걸 직원들에게 강조하기 위한 조치다.

"공간만 바꾼다고 보수적인 은행 직원들이 갑자기 혁신가가 되는 건 아니다"라는 지적도 많다. 임원들 사이에서는 "직원들이 매일 옮겨다니니 같은 건물에 있어도 얼굴 보기 어렵고, 지시나 보고를 메신저나 메일로만 해야 하는 게 영 불편하다"는 불만이 나온다. 사이 좋은 직원들끼리만 모여 앉거나, 아이디어를 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는 직원도 적지 않다. 한 시중은행 디지털 담당 임원은 "대단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공간 혁신이 아니라 보수적인 은행들이 관행을 바꿔가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이 강하다"며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봐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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