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츠 어 나이스 데이" 65세 학생 가르치는 18세 선생님

조선일보
입력 2019.06.26 03:00 | 수정 2019.06.26 09:44

숭문고 학생들, 일성여중고 만학도들에게 무료 과외 봉사

"여기 이놈과 이놈이 크기는 다른데 생긴 게 똑같네요. 꼭 아빠와 아들 같지 않아요?"

지난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숭문고 한 교실에서 3학년 이기찬(18)군이 종이에 평행사변형을 그려놓고 '닮은꼴 도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군의 '과외 제자'인 정모(65)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예순다섯 살 정씨는 숭문고에서 10분 거리인 일성여중에 다니는 중학생이다. 일성여중·고는 중·고교 과정을 각각 2년씩 4년에 마치는 평생교육 기관이다. 정씨도 일찍 결혼해서 자식·손주 키운 뒤 지난해 이 학교에 입학했다.

숭문고 학생들은 지난달부터 일성여중·고 학생들에게 월 1회 수학과 영어를 무료 과외 해주고 있다. '숭문교육나눔'이라는 봉사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38명이 참가했고 이날이 두 번째 수업이었다.

이날도 정씨를 포함해 일성여중 60~70대 여학생 38명이 모였다. "부모님이 오빠와 남동생 가르치기도 벅차 저는 못 가르치셨다"는 이도 있고, "부모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학업을 접었다"는 이도 있었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숭문고의 한 교실에서 만학도 할머니들에게 숭문고 학생들이 1대1 방식으로 영어,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숭문고의 한 교실에서 만학도 할머니들에게 숭문고 학생들이 1대1 방식으로 영어,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진한 기자

이날 일성여중 학생들은 각자 '짝꿍'인 숭문고 남학생을 찾아 1시간30분 동안 아들·손자뻘 선생님의 열강을 들었다. 한 숭문고 학생이 영어 문장 밑에 한글로 발음을 적어주자 옆에 앉은 할머니가 "잇츠 어 나이스 데이"라고 또박또박 따라 했다.

허병두 숭문고 교사는 "학생들이 시간 채우기식 봉사보다 열의 있게 참여할 만한 활동을 고민하다 인근 만학도들을 위해 봉사해보면 어떨까 싶어 일성여중에 제안했다"고 했다. 숭문고 학생들 입장에서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한창 대입 경쟁할 시기에 시간을 뺏기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할머니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며 교사와 부모의 걱정이 사라졌다고 한다. 학부모 백수진(50)씨는 "2학년 아들이 과외하는 모습을 잠깐 봤는데, 할머니가 이해 못 하는 부분을 다섯 번 반복해 설명하더라"며 "평소 같으면 벌써 짜증을 냈을 텐데 할머니들이 선생님 대접을 해주며 물으니 껄렁하던 아이들도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지은 숭문고 교사는 "아이들이 차차 남을 가르치는 즐거움을 알아 가는 모습이 기특하다"고 했다.

이날 숭문고와 일성여중 학생들은 화장실 한 번 가지 않고 수업에 열중했다. 수업을 마치자 일성여중 제자들이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라며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집에서 싸온 간식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김점순(69)씨는 "이렇게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알려주는데 아무리 어려도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했다. "자기 공부하는 시간 쪼개서 가르쳐주는 건데 어찌나 고맙고 미안한지요."

할머니들을 가르치면서 숭문고 학생들도 달라졌다. 도승현(18)군은 과외에 앞서 함께 사는 외할머니에게 '연습 수업'을 하기도 했다. 도군은 "할머니들은 자식이나 손주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실 때가 있다"며 "요즘은 외할머니한테 스마트폰 쓰는 법을 알려드리고 있다"고 했다. 정무경(18)군은 "제때 공부할 기회를 가진 제가 행운이라고 느꼈다"며 "과외를 하고 나면 오히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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