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靑이 軍을 '핫바지'로 만들었다"

입력 2019.06.25 03:15

'北 목선 축소 발표' 汚名 쓴 軍 내부선 "있는 그대로 발표할걸"
'靑 가이드라인 제시'에 불만… "일선 부대장만 징계" 전망도

최재혁 정치부 차장
최재혁 정치부 차장

역대 정부는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을 적어도 하나씩은 안고 있었다. 어떤 사건은 정권이 교체된 뒤에까지 전직(前職)들을 괴롭혔다. 사건 자체보다 그걸 감추는 과정에서 벌어진 행태가 더 문제가 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북한 목선 대기 귀순' 사건에서 그런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북한 목선 귀순 사건으로 군(軍)은 치명상을 입었다. 경계 실패뿐 아니라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오명(汚名)까지 뒤집어썼다. 북한 목선은 15일 새벽 자체 동력으로 유유히 삼척항으로 들어와 부두 끝 방파제에 접안했다. 군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17일 첫 브리핑에서 "북한 목선을 삼척항 인근에서 접수" "북한 목선이 떠내려왔다"고 해 진상을 호도했다.

이처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군 내부가 심상치 않다고 한다. 군 관계자는 "초기에 합참에서는 있는 그대로 상황을 내보내자(공개하자)는 의견도 있었던 걸로 안다"며 "청와대 '가이드라인'대로 했다가 이 지경이 됐다"고 했다. 그는 "청와대가 군을 '핫바지'로 만들었다"고도 했다.

이번 사건은 북유럽을 순방 중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에 머물 때 일어났다. 16일 낮 12시 50분 문 대통령이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최종 컨트롤타워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었다. 그런데 국방부는 15일 사건 발생 이후 이틀간 함구했다. 그때 국가안보실은 뭘 했던 것일까.

국방부는 17일부터 브리핑을 시작했고 첫 번째가 문제의 "삼척항 인근서 목선 접수" 브리핑이었다. 당연히 청와대 안보실과의 '조율'을 거쳤을 것이다. 안보실은 행정관을 국방부 브리핑장에 보내 현장 반응을 체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부터 북한 목선을 목격한 주민 증언에 사진까지 속속 알려졌다. 이틀 뒤인 19일 국방부 브리핑에서는 '왜 삼척항 인근 해상서 목선을 데리고 온 것처럼 사안을 축소했느냐'는 추궁이 쏟아졌다.

그러자 20일 정경두 국방장관은 대국민 사과에서 합참, 육군 23사단, 해군 1함대에 대한 고강도 조사 카드를 꺼냈다. 이날부터 국방부는 '조사 착수'를 방패 삼아 국회의 자료 요청에 비협조적으로 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빈틈은 다른 데서 생겼다. 해양경찰청이 북한 목선 발견 19분 만에 청와대, 총리실, 국정원 등에 전파한 상황보고서가 그날 오후 공개된 것이다.

불똥이 자기 쪽으로 튀자 청와대가 나섰다. 청와대는 생뚱맞게도 '국방부 브리핑에 축소·은폐는 없었다'며 군을 감쌌다. 압권은 "삼척항 인근도 삼척항"이란 설명이다. 청와대 대변인은 "항(港)은 방파제, 부두를 모두 포함한다. '인근'은 군에서 많이 쓰는 표현"이라고 했다. 축소·은폐가 아닌 또 다른 근거로 동해해양경찰서가 목선이 입항한 15일 오후 지역 기자 10여 명에게 '북한 어선이 자체 수리해 삼척항으로 왔다'는 문자를 보낸 것을 들었다. 대부분 언론은 물론 국방부조차 그런 문자가 발송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책임을 다했다는 얘기였다.

모든 정보를 장악한 청와대가 군의 초기 축소 브리핑을 방치하고, 대통령이 뒤늦게 "철저한 점검" 지시를 하기까지의 과정을 납득시키기엔 허점투성이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그 설명이 향후 국방부 조사에선 또 하나의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군 내부에서는 "컨트롤타워인 청와대는 빠져나가고 일선 부대장들만 경계 실패로 작살날 것"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군을 망쳐놔도 되는 것인가. "진실은 감추고자 할수록 더 드러나게 돼 있다"는 군 간부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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