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트럼프 입에서 "동해"가 나오려면

조선일보
입력 2019.06.19 03:15

트럼프의 '일본해' 발언… 우리 외교 실패 아니지만 한국 와선 '동해'라 해야
이렇게 하는 게 외교력

임민혁 논설위원
임민혁 논설위원
최근 우리 정부가 미 언론사에 '동해(East Sea)'를 써달라는 요청을 해 성사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지면·화면에 쓰는 지도에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하던 것을 '일본해/동해'로 바꾸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주일미군 기지에서 연설할 때 "일본해"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고 한다. 미 언론사 관계자는 이 얘기를 전하면서 "일단 보류됐지만 완전히 무산된 건 아닌 것으로 안다"고 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모든 공해(公海)에 대해 1개의 명칭만 사용한다. 미 지명위원회(BGN)가 동해에 대해 결정한 표기는 '일본해'다.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지만, 미 정부의 기본 방침이 그렇다. 하지만 이게 변경 불가한 절대 원칙은 아니다. 버지니아주는 새로 만드는 교과서에 동해를 일본해와 같이 쓰고 있다. 한인 단체들이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결과다. 미 맥아더 장군 기념관의 지도는 '일본해'로 표기돼 있다가 우리 측의 요청으로 '동해'로 바뀌었다. 몇 년 전 미 펜타곤 내에 설치된 6·25전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전시물 지도가 모두 '일본해'로 돼 있는 것을 보고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한·미 동맹을 기리는 전시물인데 한국 입장을 배려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안내를 맡았던 미군 장교가 "일리 있는 말이다. 아마 따로 ('동해'로 바꿔 달라는) 요청이 없어서 그냥 원칙대로 했을 것"이라고 했다. 두드리면 열릴 수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동해 표기' 문제는 한·일 관계에서 또 하나의 뇌관이다. 당장 발등의 불인 강제징용, 위안부 이슈에 비하면 한가해 보이지만 '동해/일본해'를 둘러싼 한·일전은 예고돼 있다. 세계 바다 이름의 국제적 표준을 결정하는 국제수로기구(IHO)는 "내년 4월 열리는 총회까지 한·일이 동해 명칭을 협의해 보고하라"고 했다. 세계 지도 제작 지침서인 IHO의 '해양과 바다의 경계'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초판부터 '일본해'를 단독 표기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데, 90년 만에 변경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우리 정서상으로는 '동해 단독 표기'가 돼야겠지만, 국제 여건을 감안하면 '일본해/동해' 병기만 이뤄져도 큰 진전이다.

이미 한·일 간 비공식 협의는 시작됐고 각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여론전도 진행 중이다. 세계 각국 출판물이 '일본해/동해'를 병기하는 비율은 꾸준히 늘어 20~30%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일본해가 국제적으로 확립된 유일한 호칭"이라는 논리를 각인시키는 데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일본 자민당은 최근 영토주권에 관한 연구기관을 설치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이는 '일본해' '다케시마'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는 게 목적이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 외교는 한·일 간 갈등 사안에서 선제적 대응을 하기보다는 여론이 들끓은 다음에 수습하는 모습을 반복했다. 그러다 해법을 못 찾으면 반일(反日) 감정에 기대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냉철한 전략과 실력이 없다면 내년에도 똑같은 장면을 볼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일본에서 '일본해'라고 한 걸 우리 외교 실패로 연결할 필요는 없다. 미·일 동맹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미 해군의 여러 작전 수역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일 뿐이다. 우리는 트럼프가 한국에 와서 주한미군 앞에서 연설할 때 "동해"라는 발언을 끌어낼 수 있는 외교력을 갖추면 된다. 미국의 표기 방침이 있다지만, 세세한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트럼프라면 우리 하기 나름이다. '무능' '실책' 오명에 빠져 있는 우리 외교가 그런 반전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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