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의 경험이 인간과 '기계'를 가른다

조선일보
입력 2019.06.18 03:00

극한의 상상력, SF 거장의 귀환 '테드 창'

세계 최고의 SF 작가라는 테드 창(51)이 보낸 경고가 도착했다. 가까운 미래, 자동차 리모컨 모양으로 녹색등과 버튼이 달린 '예측기'가 개발된다. 예측기는 당신의 행동을 예측해 버튼을 누르기 1초 전 초록색 불빛을 반짝인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비웃는 예측기가 발명되자 어떤 선택도 거부한 채 허무에 빠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예측기가 개발된 미래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경고한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고 실험처럼 알쏭달쏭한 이 이야기는 테드 창의 신작 '숨'(엘리)에 수록된 단편 '우리가 해야 할 일'로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과학계도 주목하는 SF 소설가 테드 창은 미국 브라운대에서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으며 SF계 최고 권위의 휴고상, 로커스상, 네뷸러상을 각각 4번이나 받았다. 그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는 에이미 애덤스 주연의 영화 '컨택트'로 만들어졌다.

테드 창의 신작은 국내 출간되자마자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그는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차역에서 ‘테드 창 아니냐’고 물어온 사람이 있었다”면서 “미국에서도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테드 창의 신작은 국내 출간되자마자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그는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차역에서 ‘테드 창 아니냐’고 물어온 사람이 있었다”면서 “미국에서도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Alan Berner

국내 출간을 기념해 이메일로 만난 테드 창은 "내가 쓴 많은 소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라며 "다른 주제를 쓰려 해도 자유의지에 발목 잡힐 때가 있다"고 했다. "실제 삶에선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 바뀌지 않는 운명 따윈 없다고 믿습니다.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정이라도 바꿀 수 있죠."

아라비안나이트풍 단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도 비슷한 시각이 담겼다. 20년 후의 과거나 미래로 건너갈 수 있는 '세월의 문'을 발견한 아랍 상인 푸와드.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도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이런 경우 흔히 비극으로 치닫지만 테드 창의 소설은 다르다. 시간 여행을 떠난 주인공 푸와드는 과거의 상처를 되풀이하면서 이전에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고 과거를 새롭게 해석한다. 테드 창은 "이야기 속 타임머신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도구"라면서 "하지만 실제 타임머신이 있다면 누군가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소설은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 앞에서 인간의 가치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에선 아이 수준 지능을 가진 AI(인공지능) 반려동물이 개발된다. AI 반려동물을 입양한 이들은 지난한 육아 과정을 겪는다. 말을 가르치고, 친구를 만들어주고, 욕과 거짓말을 배우면 혼내고,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는다. 테드 창은 "인간은 경험의 산물이며 한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결국 그 사람이 된다"면서 "경험이 부족한 로봇이 사람을 대체하리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 인간 못지않게 오랜 시간 경험을 쌓은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진다면,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봐야겠죠."

단편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에선 더는 글을 쓸 필요가 없는 시대를 그린다. 몸에 달린 카메라로 전 생애를 영상으로 남기고, 하고 싶은 말을 중얼거리면 컴퓨터가 대신 글을 써준다. 구구절절 진술서를 쓸 필요도 없다. 시시콜콜한 부부 싸움부터 법적 분쟁까지 과거 영상만 검색하면 그만이다. 이런 미래를 예상한다면 왜 계속 책을 쓰는 걸까. "요즘은 요약된 기사로도 책을 읽을 수 있죠. 보통 사람은 대부분 그 정도면 충분해요. 하지만 책을 쓴 사람은 긴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런 설득력 있는 주장에 다다를 수 없었을 겁니다. 책은 생각의 성장을 위해 여전히 필요합니다."

고도의 지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그의 소설은 읽히는 속도 못지않게 집필 속도도 더디다. 이번 신작도 17년간 쓴 9편의 작품을 묶었다. 테드 창은 과작(寡作) 이유를 "완벽하게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나 고민할 만큼 뭐라도 써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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