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품격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

입력 2019.06.18 03:15

부자에 사기치는 가난한 가족, 천안함 유족에게 김정은 사진
개인이든 국가든 품격이 있어… 품격 갖춰야 경제도 성장한다

이한수 문화부 차장
이한수 문화부 차장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을 최근 두 번 접했다. 하나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 인터뷰. 봉 감독은 영화 '기생충'에 대해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가 붕괴되는 순간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가난한 기택(송강호)네 가족은 서류를 위조하고 경력을 속여 부잣집에 차례로 취업한다. 아버지는 아들딸의 사기 행각을 되레 독려한다. 현실에선 가난하다고 해서 이렇게 살지는 않는다. 1인당 국민소득 100~200달러 수준이었던 1960년대에도 '가난하니까 사기 쳐도 된다'고 자식에게 가르치진 않았다. 당대 시인 김관식(1934~1970)은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마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병상록' 일부)고 썼다.

또 하나는 현충일 대통령 추념사와 천안함·연평해전 유족을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 대한 야권 반응이다. 바른미래당은 지난 7일 "어떻게 6·25전쟁의 가해자에 버금가는 이를 역사까지 설명하며 추켜세우고 칭송할 수 있는 건지 국민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천안함·연평해전 유족들에게 김정은 위원장 내외의 손을 치켜들고 활짝 웃는 사진 책자를 사려 없이 나눠준 것부터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고 논평했다. 자유한국당은 "5·18 유족들을 불러놓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을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말한 기본과 상식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뭐냐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기생충'에서 부자 박 사장(이선균)이 '빈자(貧者)의 냄새'에 멸시를 드러낸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야당이야말로 '막말'이나 하는 집단이라는 비판도 있다. 서로에게 예의 없는 행동과 말투로 예의를 지키라고 하는 형국이다.

사회학자 이재열 서울대 교수는 최근 낸 책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에서 우리 사회를 불신·불만·불안의 '3불 사회'로 진단했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자살률은 세계 최고, 행복도는 최저 수준이다. 대통령을 직접 뽑는 민주화를 이룬 지 30년 넘었고 '촛불 혁명'까지 했다는데 정치 수준은 바닥이다. 이 교수는 이를 '풍요의 역설' '민주화의 역설'로 지적하면서 해결책을 '품격'에서 찾았다. '선진국들은 경제성장을 했기 때문에 사회의 품격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소득 수준이었을 때 이미 일정한 사회의 품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더 성장할 수 있었고,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254쪽).

나라에도 개인에게도 '품격'이 있다. 품격이란 인간에 대한 예의가 바탕이다. 가난하니까 부자에게 사기 쳐도 된다? 노동자 권익을 위해 투쟁하니까 폭력·불법 저질러도 된다? 우리는 정의롭고 저들은 악(惡)이니 상대를 '적폐'로 몰아도 된다? 권력 잡아야 하니까 대립과 혐오쯤 부추겨도 된다? 이런 예의 없고 품격 없는 행위가 나라 발전을 가로막는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소설가 공지영이 1993년 발표한 단편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 주인공은 속물이 된 운동권 선배 모습에 당혹감을 느낀다. 신념을 버리고 현실에 주저앉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서 인간에 대한 예의 또는 품격이 사라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통령 추념사에 '품격'을 바꿔넣어 다시 읽어 보았다. "품격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의 선 안에서 품격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옳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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