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시인이 '베낀' 책

조선일보
입력 2019.06.15 03:00

이한수 Books팀장
이한수 Books팀장
윤동주는 분명 '맹자'를 읽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란 '서시' 첫 부분은 맹자를 '베낀' 것입니다. 맹자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을 말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것[仰不愧於天]'을 첫째로 꼽았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베낀 건 아니지요.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넘어 죽어가는 것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김수영은 '논어'를 베꼈습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로 바람이 지나가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말이 '안연'편에 나옵니다. 이 말은 '맹자'에도 나오네요. 김수영도 그대로 베끼진 않았습니다. '군자=바람' '소인=풀'의 관계를 뒤집었지요. 연약한 풀은 광포한 바람이 불면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일갈했습니다.

작가는 반드시 독자이기에 남의 글의 체취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문학평론가들은 이를 '상호텍스트성(性)'이라고 하더군요. 글을 읽다가 기시감이 든다면 예전 읽었던 작품 목록을 떠올려보시지요.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는 일본 삿포로 맥주박물관 벽에 적혀 있는 다나카 후유지(1894~1980)의 시를 보다가 기시감이 들었답니다. 한참 만에 백석(1912~1996)이 떠올랐다네요. 신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민음사) 첫 장에서 '상호텍스트성의 현장'이란 제목으로 두 시인의 유사성을 적었습니다. '청년기의 백석이 다나카 후유지의 시에서 발상을 얻은 경우도 있다는 것은 확언해도 좋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럼 '베낀' 것이냐고요? 유 교수는 말합니다. "예술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란 있을 수 없다. 기존 관습에 개성을 접목함으로써 작품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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