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엔 한없이 고운 가루… 어찌 죽음과 싸우겠는가

조선일보
  • 소설가 김훈
  • 소설가 김연수
입력 2019.06.15 03:00

[아무튼, 주말]
삶과 분리된 암병동에서 사계절 지낸 아버지…
겨울에 가실 걸 알았다면 가을을 그렇게 보냈을까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일러스트=박상훈
연명의향서 작성자가 최근 22만명을 돌파했다. 병세가 나아질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인공호흡기와 심폐소생술 등으로 단순히 임종을 늦추는 시술은 사양하겠다는 의지다. 100세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못지않은 화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소설가 김훈과 김연수의 에세이, 그리고 최근의 현실을 기획으로 싣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소설가 김훈

소설가 김훈
망팔(望八)이 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의전을 관리하는 절차도 세련되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옹기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갔다. 원통하게 비명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는다. 부모를 따라서 화장장에 온 청소년들은 대기실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우리는 호상(好喪)입니다"라며 문상객을 맞는 상주도 있었다.

그날 세 살 난 아기가 소각되었다. 종이로 만든 작은 관이 내려갈 때, 젊은 엄마는 돌아서서 울었다. 아기의 뼛가루는 서너 홉쯤 되었을 터이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체의 먼 흔적이나 그림자였다.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하듯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은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게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딸아, 잘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정도면 어떨까 싶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스스로 '광야를 달리는 말(!)'을 자칭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미안허다.

를 남겼다. 한 생애가 4음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 더 이상 짧을 수는 없었다. 후회와 반성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좋은 유언이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었고, 대책 없이 슬프고 허허로워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퇴계 선생님은 죽음이 임박하자

―조화를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라는 시문을 남겼고, 임종의 자리에서는

―매화에 물 줘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제자들이 기록했다. 아름답고 격조 높은 유언이지만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드려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김용택의 어머니 박덕성 여사님한테서 직접 들었다. 몇 년 후에 김용택의 시골집에 가봤더니 그때까지도 연탄보일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퇴계 선생님, 김용택의 아버지, 이 세 분의 유언 중에서 나는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유언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 김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정도 유언이 나오려면, 깊은 내공과 오래고 성실한 노동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죽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한다. 의술의 목표는 생명이고, 죽음이 아니다. 이국종처럼, 깨어진 육체를 맞추고 꿰매서 살려내는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충분히 다 살고 죽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품위 있게 인도해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파이프를 꽂아서 붙잡아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소설가 김연수

소설가 김연수
내가 어렸을 때, 김천역 앞 광장에는 버드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인근의 하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오수받이가 있었다. 그 정사각형의 오수받이는 어른들도 쉽게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컸는데, 덮개 같은 안전시설이 없어 자칫하면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런데도 거기는 주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치렁치렁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들을 움켜쥐고 그 위를 날아다녔다. 나도 그런 아이들 중의 하나였다. 내가 주검을 처음 본 건 바로 그 나무 아래에서였다.

둘러선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죽은 사람은 한국전쟁 때 포로가 된 뒤 송환을 포기하고 잔류한 중공군이었다. 사람들은 그 죽음에 동정적이지 않아 침이라도 뱉을 기세였지만, 그들이 알던 중국인 부랑자는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주검은 불 꺼진 빈집 같았다. 그렇게 처음 맞닥뜨린 죽음의 장면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는 말아야지, 잘 죽어야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죽고 난 뒤에는 나라고 말할 몸과 마음이 없는데 잘 죽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일러스트=안병현
죽음에 대해 곧잘 생각하던 사춘기 시절, '법구경'을 펼쳤다가 이런 이야기를 읽었다. 걸음마를 시작하던 아들이 갑자기 죽자, 슬픔과 비통에 빠진 엄마는 아들을 되살릴 약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자신을 찾아온 그 여인에게 붓다는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의 겨자씨 한 줌이면 아들을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그 약을 찾아나선 여인은 곧 알게 됐다. 세상에 그런 집은 없으니,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그건 우리가 삶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삶과 죽음은 낮과 밤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은 황혼과 비슷하다. 생명의 태양이 다 저물고 난 뒤의 밤은 우리의 죽음이 될 수 없다. 거기에는 우리의 몸도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이라고 말하는 건 죽어감에 가깝다. 죽어감은 살아감과 마찬가지로 시간 안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죽어감은 삶의 일부다. 그러므로 잘 죽는다는 건 잘 산다는 말과 같다. 웰빙과 웰다잉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다가 소풍 가듯이 죽어가야지라고 소년 시절의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얼마나 높은 마음을 지녀야만 하는지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삼·사십대를 지나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꽤 애를 써야만 했다. 잘 산다는 것은 오직 잘 산다는 것만 뜻했지, 거기에 잘 죽는다는 것은 포함될 수 없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겨야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상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다. 죽음은커녕 뒤처지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힘들었다.

거기에는 사회의 변화도 한몫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상중(喪中)', 혹은 '기중(忌中)'이라는 글자를 붙인 집들을 곧잘 볼 수 있었다. 그 시절에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살아가던 집에서 죽어갔다. 살아감과 죽어감이 서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치명적인 병에 걸리는 순간부터 모두 병상에 수용된다. 죽어감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살아가는 존재들로부터 분리되는 셈이다. 몇 해 전,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고 암병동에 입원했을 때, 간병한 일이 있었다. 거기서 내가 본 수많은 암환자는 불과 몇백미터 떨어진 대학 캠퍼스의 젊은 학생들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죽어 있는 존재였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 암병동에서 나는 봄부터 네 번의 계절을 보냈다. 겨울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제야 나는 암병동에서 보낸 사계절 동안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랬다면 봄이나 여름의 나는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을까? 아버지는 어땠을까? 생의 마지막 가을이라는 사실을 아셨더라면? 옆에서 돌아가시는 과정을 쭉 지켜본 나로서는 설사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기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을 포기할 수 없듯이 잘 죽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암병동에서 보호자로 사계절을 보낸 경험으로 나는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됐다. 먼 훗날, 내가 죽어가고 있다면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돌아오는 겨울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번 여름의 세계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비로소 나는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역설. 이 역설을 너무 늦게, 그러니까 죽기 직전에야 알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언젠가 임사 체험을 경험한 분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한평생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는데, 그 영상 속에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보이더라고 그는 말했다. 마치 자신 바깥의 카메라가 찍은 것처럼.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그렇게 되자 내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다 보였어. 그때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뒤늦게 그 마음들을 알게 되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

죽고 난 뒤에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죽어갈 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후회할 것이고, 한 번만 더 살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암병동에서 4계절 동안 누군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봤음에도 이렇게 짐작만 할 뿐이니 나는 존엄사를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죽어가는 과정 역시 삶의 일부분이라면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존엄하게 살기를 원한다. 죽음을 늘 염두에 두기를, 잘 죽기를 바라기를, 단지 죽지 않기 위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기를, 죽어갈 때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기를…. 그렇게 나는 죽음 앞에서 존엄생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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