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꽂고 버티긴 싫다… 연명의향서 작성자 22만명 넘어

조선일보
입력 2019.06.15 03:00

[아무튼, 주말]
미리 작성해두지 않으면 선택 당해
가족 간 갈등 원인 제공할 수도 '좋은 죽음'에 대한 관심 커져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연명의료제 도입이 이끈 변화입니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의 한 천막 앞. 노인 17명이 길게 줄 서 있었다. 임종을 앞두고 연명 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연명의향서)'를 신청받는 자리였다. 순서를 기다리던 한 노인은 "신청하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라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약 2시간 30분 동안 50여 명이 서약했다. 연명의향서를 받아온 각당복지재단의 이혜원 실장은 "얼마 전에는 '3대(代)가 함께 서명할 테니 오라'며 구순 잔치에 초대받기도 했다. 격세지감"이라고 말했다.

연명 의료란 병세가 나아질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인공호흡기와 심폐소생술 등으로 단순히 임종을 늦추는 의학적 시술이다. 우리나라 연명 의료에는 세 번의 변곡점이 있었다. 보호자 뜻에 따라 연명 의료를 중단한 의사가 살인방조죄로 판결받은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회생할 수 없을 경우 가족 등이 진술한 환자 의사에 따라 연명 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2009년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판결, 그리고 지난해 2월 시행된 '연명의료결정제도'다. 이전에는 환자나 가족의 뜻과 무관하게 연명 의료를 진행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받지 않으려면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19세 이상 성인은 간단한 서류로 20~30분 만에 연명 의료를 받을지 안 받을지 결정할 수 있다.

시행 16개월이 지났다.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연명의향서 작성자는 22만170명이다(지난 5월 기준). 작년 12월까지 8만6691명이던 숫자가 올 들어 가파르게 늘었다. 연명의향서는 자신이 연명 의료를 받을 경우를 대비해 의식이 있을 때 미리 작성해두는 서류다. '호스피스를 이용하겠다' '수혈은 받지만 인공호흡기는 꽂지 않겠다' 등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말기 환자 또는 임종 과정의 환자에게 의사가 직접 받는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자도 지난해 1만3182명에서 올해는 누적 2만2649명으로 늘었다.

'웰다잉'을 돕는 호스피스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제도 시행 전에는 말기 환자에게 호스피스를 추천하면 "아무 짓 말고 죽으라는 거냐?"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상담이 밀려 대기자가 생기곤 한다. 김혜지 서울동부시립병원 가정의학과장은 "죽음을 대비한 '사전(死前) 가족 모임'에도 거부감이 줄었다"며 "연명 의료 중이라면 상태가 악화될까 봐 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①건강할 때 연명의향서를 미리 작성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입을 모은다. ②회복 가능성이 희박한 말기 환자가 쓰는 '연명의료계획서'도 있다. 말기 상태가 되면 온전한 정신이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환자의 뜻이 상대적으로 덜 담긴다는 게 단점이다. ③명문화된 결정 없이 의식을 잃게 되면 평소 환자가 연명 의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가족에게 물어 결정한다. 이 방법도 안 될 경우 ④배우자와 1촌 가족이 전부 동의해야 연명 의료를 중단한다. 단계를 거듭할수록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 덜 반영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명 의료 중단 이행 건수는 ④부터 ①까지 역순으로 많다. 연명 의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늘어 가지만, 인프라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연명의향서를 통한 이행은 전체(5만291명)의 약 0.9%(474건)에 불과하다. 연명의료계획서에 따른 이행은 31.8%(1만5996건), '환자 가족 진술'과 '가족 전원 합의'는 각각 32.2%(1만6197건), 35%(1만7624건)로 조사됐다.

'웰다잉'을 연구해온 윤영호 서울대 가정의학과 교수는 "제도의 취지와 달리 3명 중 2명이 가족에게 선택을 맡기는 꼴"이라며 "병원, 주민센터 등에서 수시로 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게 접근성을 높이지 못한다면 보여주기식 정책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지역마다 신청 기관이 달라 간헐적 행사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 뜻밖의 부작용도 있다. 한 대형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는 "전에는 명백한 자연사일 경우 최소한의 조치만 취한 뒤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했다. 지금은 임종 기간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전문의를 호출하고 가족에게 중단 여부를 물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해졌다"고 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 결정하는 사람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시간이 갈수록 신청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라며 "현장에서 발견된 문제를 검토하고 제도를 보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의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연명의향서)

의사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건강할 때 미리 어떤 치료를 원하는지 남겨 두는 문서다.

:연명의료계획서

의사 2인 이상에게 수개월 내에 사망할 것 같다는 판단을 받았을 때 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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