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도, 요리도, 인생도… 결국은 氣勢다

조선일보
  •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19.06.15 03:00

[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애정만세]

[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애정만세]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기생충’에서 최우식이 연기한 과외 선생 기우가 모르는 문제 앞에서 머뭇대는 제자에게 “시험은 기세다”라고 말한다. 기우는 수능 시험만 네 번 본 가짜 대학생이다. 시험뿐 아니라 일, 서예, 요리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대범하게 밀고 나간다. 중요한 일이다. 사진은 ‘기생충’에서 기우가 부잣집 딸 다혜에게 과외를 하는 장면. / CJ E&M
'기생충'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과외 시범 수업이었다. 과외 선생은 별일 없이 과외 선생으로 채용될 것이겠지만(그래야 영화의 전개가 막힘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긴장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참관해 수업을 지켜보고 있는 데다, 그는 진짜 대학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능을 네 번 봤다고 했었나? 하여튼 과외 선생은 입시에 실패해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들키지 않길 바라며 얼마나 과외 선생다운지를 지켜봤다. 그런데 '과외 선생다움'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과외를 많이 받아보지도 못했고, 과외 선생 노릇도 별로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과외 선생다움'에 대해서 피력할 만한 입장이랄 게 없는데…. 첫 과외 선생으로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과외를 받겠다는 아이는 건축업을 하는 집의 딸이었는데, 나는 과외를 하는 게 처음이 아닌 것처럼 뭔가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행동하려고 했었다.

'기생충'의 이 시범 수업에서 과외 선생은 대뜸 과외 제자의 팔목을 잡는다. 과외 선생이 남자고, 과외 제자가 여자라 더 부적절해 보인다. 딸의 팔목이 잡히자 딸의 어머니 표정이 변하고, 그걸 보는 나도 '뭐지?' 싶었다. 그때, 이 과외 선생은 말한다. "시험은 기세야." 정확한 인용이 아닐 수도 있다. '시험은 기세지'였을 수도 있고, '시험이라는 건 기세야'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제자가 모르는 문제 앞에서 머뭇거리자 그는 이 '기세'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기세라는 건 흐름인데, 이 흐름을 잃고 나면 시험을 잘 볼 수 없다고. 역시나 정확하지 않지만, 과외 선생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나는 깊이 공감했다. 기세라는 것, 흐름이라는 것, 이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시험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나로서는 서예가 그랬다. 초등학교 때 잠시 서예를 한 적이 있었다. 따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게 서예였다. 좋아했으니 잘하고 싶었다. 다른 일들처럼 대강대강 해치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저냥 잘해서는 안 됐다. 아주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붓을 들면 생각이 많아지곤 했다. 상상 속의 나는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왕희지거나, 붓을 칼처럼 휘두르는 종이 위의 검객이었는데 현실의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머뭇거리면 먹이 떨어졌다. 먹은 기필코 종이에 얼룩을 만들었고. 인상을 구기고 얼룩 위에 글자를 써보기도(덧칠해보기도) 했지만… 글자는 이미 평정을 잃은 나만큼이나 균형을 잃고 말았다. 봉준호식으로 말하자면, 기세가 꺾였던 것이다.

이 '기세'라는 말을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기생충'의 영어판 번역자 달시 파켓이 어떻게 번역했을지 궁금해졌다. 일단, '기(氣)'를 어떻게 번역할 수 있단 말인가. 풍수와 한의학과 이기론 없이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혈(血)'과 '맥(脈)'과 '숨'과 '바람'이 연상되기도 하는, 그러니까 만물의 근원이자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요상한 단어를 말이다. 에너지도 아니고, 힘(power)도 아니다. 정력(stamina)도 아니고, 활력(vigor)도 아니다. 그저, '기'다. 이 '기세' 신을 보다가 이 단어야말로 '무당'이나 '배냇저고리'보다 더 동양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애정만세]
영국의 요리 연구가 니겔라 로슨이 냄비에 버터를 넣고 있다. / 유튜브 캡처
그렇다고 우리가 이 '기세'라는 말을 자주 쓰는 건 아니다. 거의 스포츠 뉴스에서만 접하는 것 같다. '무서운 기세를 이어가는 손흥민'이라든가 '류현진이 5월의 기세를 6월에도 이어간다'는 식으로 아주 잘하고 있는, 전 국민이 열렬히 지지하는 스포츠 스타를 미디어에서 응원할 때 쓰는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는 '기세' 대신 '기'를 쓴다. '요즘 기가 허해서'라고 쓰기도 하고 '기가 센 사람은 불편'하다고 하면서 또 '기가 세 보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기도 한다. 물론 '기세'와 '기'는 다른 말이다. '기생충'에서 송강호네 가족은, 과외 선생으로 취직한 아들을 필두로 딸, 아버지, 어머니까지 네 식구 모두가 이선균네 집에 취직한다. 가끔 피자 박스 접는 것 말고는 네 식구 모두 일없이 놀다가 갑자기 이렇게 됐던 것이다. '기세'를 몰았기 때문이다. 기세를 몰아 가세를 펴려고 했던 네 식구였다.

사노 요코의 책 '사는 게 뭐라고'에도 '기세'가 나온다. "요리에는 기세라는 게 있다." 아주 마음을 끄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런 맥락에 뒤따르는 말이다. 사노 요코는 텔레비전으로 요리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이어지는 묘사. "여자는 카메라를 향해 뭐라고 말하면서, 손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커다란 볼에 대고 푸성귀를 거칠게 팍팍 뜯었다. 모든 재료를 실로 대범하게 자르고 잇달아 볼에 처넣었다. 소스를 만들 때도 마늘을 절구에 넣고 있는 힘껏 빻았다. 식초도 오일도 마음 가는 대로 뿌리고, 마지막에 치즈를 쓱쓱 갈아서 드레싱에 넣었다. (…) 그런데 그 샐러드가 정말로 맛있어 보였다. 그렇다, 요리에는 기세라는 게 있다"고 썼다. 그러고는 덧붙인다. "음, 마음에 든다. 나는 그 대범함에 마음이 이끌렸다. 다이내믹하고 서글서글한 맛이 상상이 된다. 내일도 봐야지."

나는 깊이 공감했다. 사노 요코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요리를 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었다. 니겔라 로슨이다. 니겔라 로슨은 영국의 요리연구가로, 한국에서도 한때 그녀의 요리 프로그램이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었었다. 당시 나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지금은 본다), 그녀의 프로그램만은 예외였다. 니겔라 로슨에게 반해 있었기 때문이다. 요리를 하면서 그녀가 짓는 표정과 몸짓, 쓰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짧은 한숨 같은 것들에. 제작진도 나처럼 니겔라에게 빠져 있었던지 요리 프로그램답지 않게 '뽀샵' 처리를 많이도 했었는데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니겔라가 거침없이 뿌리는 석류알과 슈거 파우더가 신비의 물질로 보이게 하는 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슈거 파우더는 싸락눈 같았고, 석류알은 별사탕 우박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기세'라는 말을 퍽이나 애정해 왔던 것 같다. '기생충'에 나온 '기세'를 떠올리다 무심코 '사노 요코가 기세라는 단어를 썼었지'라는 연상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그 기세를 몰아 이 글까지 쓰게 된 걸 보면 말이다. '기세'라는 말의 기세가 마치 주문처럼 느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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