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가 아니라… 미성숙한 남자와 이별이었다

조선일보
입력 2019.06.15 03:00

[아무튼, 주말-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일러스트=안병현
'나처럼 살지 마라'는 어머니의 말은 딸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내 실패에 겁먹지 말고 원하는 길을 가라는 어머니의 말은 더 크고 강인한 사랑입니다. 자기 비하와 편견 없이, 자신의 실패를 돌아본 사람만이 갖는 지혜일 겁니다. 홍여사

열 시쯤에나 들어올 줄 알았던 딸이 오늘은 어쩐 일로 저보다 먼저 퇴근해 있습니다. 그럴 듯한 찌개냄새까지 풍기며 살갑게 문을 열어주니 웬일인가 싶더군요. 실은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이 녀석은 원래 밖에서 눈물 빼고 들어온 날 유난히 깔깔대며 썰렁한 애교를 부리는 아이거든요.

딸이 차려준 저녁밥을 먹으며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습니다. 너, 무슨 일 있어? 그 댁 어른들한테 무슨 말씀 들은 거니? 그러나 그 말은 입속을 뱅뱅 돌다 도로 삼켜지고 맙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 며칠 아이의 얼굴이 어두워 걱정이었습니다. 남자친구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온 뒤라 더 마음에 걸렸지요. 당일의 아이 표정은 더없이 밝았는데…. 부모 노릇이라는 게 결국은 끝없는 기다림이라던가요? 저처럼 혼자인 부모는 그 인내심도 두 배로 필요한 듯합니다. 아이가 속을 터놓을 때까지 기다려주되 괜한 상상, 섣부른 지레짐작으로 불안해하는 건 금물이지요. 저는 시치미 뚝 떼고 맛있게 잘 먹은 얼굴로 엄지를 치켜세웠습니다. "너 당장 시집가도 엄마보다 잘 해먹고 살겠다. 인정!"

"엄마. 사실은 나 이 결혼, 좀 자신 없어졌어."

본론은 그렇게 설거지까지 끝나고야 나왔습니다. 딸은 마치 '아까 그 찌개 좀 짰어'라고 말하듯, 덤덤한 얼굴이더군요. 나 역시 사과 한 조각을 건네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처음 해보는 결혼인데?"

그렇게 쿨하게 말해놓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딸의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면전에서는 결혼을 서두르시더라는 그 댁 부모님이 이후에 아들을 통해 결이 다른 말씀을 하신 건 아닌지, 행여 이혼 가정의 아이라는 점을 새삼 문제 삼으신 것은 아닌지…. 그러나 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오빠네 가족은 너무… 화목해.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빠가 진짜… 효자인 것 같아."

화목한 집안의 효자! 그 순간 난 할 수만 있다면 쿨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효자가 어때서? 난 불효자 사위는 싫은데.' 그러나 그 말이 목에 걸려 잘 안 나오더군요. '효자'라는 말 속에 담긴 딸아이의 커다란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제 아빠를 떠올리고 있었던 겁니다. 부모님께 단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던 효자 아빠. 부모님께 순종하는 만큼 처자식에게는 복종을 강요하던 권위적인 아빠. 처자식보다는, 부모·형제를 우선순위에 두고 살던 사람. 결혼도, 일도 모두 효도의 방편처럼 생각하던 사람….

그 사람과 17년을 살고 끝내 헤어졌습니다. 큰딸이 열여섯, 둘째 딸이 열두 살 때였죠. 한참 민감한 두 딸이 행여라도 '엄마가 아들을 못 낳은 탓에 배겨나지 못했다'고 생각할까 봐 두렵더군요. 그래서 저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이유를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 아빠를 아빠의 가족들에게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고요. 엄마가 너희에게 두 몫의 부모 노릇을 하려면 그 집을 나와야 했다고요.

그 뒤로 정말 열심히 살았고, 두 아이는 하늘에 감사할 만큼 잘 자라 주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직장에도 열심히 다녀서 대견했지만, 결혼할 사람이라며 남자친구를 데려왔을 때 제일 기뻤습니다. 인상도 훈훈한 청년이 딸아이를 진심으로 아껴주더군요. 그 덕에 딸아이의 마음도 활짝 열린 듯했고요.

그런데 오늘 딸아이는 그런 말을 합니다. 효자와의 결혼은 자신이 없다고. 아마도 그 말은, 엄마처럼 살 자신은 없다는 소리겠지요. 하긴. 누구 못지않게 불행하고 힘겨웠던 결혼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효자 남편 때문이었을까요? 처음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헤어지고 세월이 제법 흐른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죠. 남편은 효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에게 정신적으로 얽매여 있는 미성숙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남자가 어머니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자기 여자에게 어떻게 할지 알 수 있다는 말. 이제 보니 맞는 말입니다. 남편은 어머니와 수직 관계였기 때문에 저에게도 그런 일방적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제가 괴로웠던 것은 효행의 고단함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에게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사랑과 존중을 못 받고 일꾼이나 도구 취급을 받는다는 점이었죠. 남편만 내 편이 되어주었다면 그보다 더한 고생도 참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내 고달픔을 안타깝고 미안하게 여겨주기만 했더라도….

제 이혼은 효자와의 헤어짐이 아니었습니다. 내게 무자비했던 미성숙한 남자와의 이별이었고, 그를 끝내 사랑으로 품을 수 없었던 내 작은 그릇과의 결별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딸들에게 늘, 늘 말해왔습니다.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남자,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라고요. 잠깐 봤지만, 딸의 남자친구는 천성이 다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개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에게도 헌신하지요.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을 볼 줄 몰랐습니다. 유능하고 똑똑하고 잘생긴 청년을 무턱대고 골랐죠. 그러니 딸만큼은 사람을 잘 보고 결혼했으면 좋겠습니다. 학벌과 인물에 혹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효자니, 장남이니, 흙수저니 하는 꼬리표 때문에 좋은 인연을 놓칠까 봐도 걱정입니다. 엄마의 실패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을까 봐 더욱더….

"네 아빠는 똑똑하고 잘생기고, 여러모로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절대 효자는 아니었어."

"엥?"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봅니다. 그 까만 눈을 보니 갑자기 목이 멥니다. 어느덧 솜털을 벗고, 둥지 밖으로 날아오르려는 내 새끼에게 엄마의 진짜 실패담을 들려줘야겠지요. 세상에 대한 원망, 불운에 대한 푸념이 아닌 진짜 실패담을.

"엄마는 말이야…."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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