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루기도 안하고 놀이방 전락한 태권도장… 수련의 가치 회복해야"

조선일보
입력 2019.06.15 03:00 | 수정 2019.06.15 16:10

[아무튼, 주말]
美 태권도 마스터 정순기 관장

美 태권도 마스터 정순기 관장
태권도 공인 8단의 앞지르기. 정순기 관장은 사범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범으로 꼽힌다. 미국 버펄로에서 도장의 성공 모델을 만든 그는 “수련의 가치에 충실할수록 인성 교육이 되고 성인 수련생도 늘어난다”며 “한국 태권도장들이 종주국다운 모습을 회복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미국 뉴욕주 북서쪽에 '태권 도시'가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 옆 버펄로(인구 100만명). 이 도시엔 '월드클래스'라는 이름의 도장이 다섯 곳 있다. 2100명이 구슬땀을 흘리며 태권도를 익힌다. 시민 1000명 중 2명이 수련생인 셈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하는 우리 태권도장들과 달리 성인이 30%이고 가족 회원이 많다. 승합차로 수련생을 실어나르지도 않는다.

정순기(69) 월드클래스 관장은 '그랜드 마스터'로 불린다. 태권도 고단자(8~9단)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1979년 미국으로 이민 가 시러큐스를 거쳐 버펄로에 터를 잡았다. 40년 동안 수련에 매진하고 태권도로만 승부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지난달 전북 무주에서 연 '태권도장 박람회'에 그를 강연자로 초청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만난 정 관장은 "태권도장은 스트레칭을 하며 놀아주거나 엄마·아빠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붙잡아두는 곳이 아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미국에서는 수련의 가치에 더 충실합니다. 도장이 그 지역에서 사회적 기능도 하고요. 한국에선 아이들 다칠까 봐 겨루기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파트너가 되는 훈련을 하며 잠재력도 끌어낼 수 있는 보물(겨루기)을 왜 종주국에서 팽개치나요?"

성공한 태권도 세일즈맨

그는 육군 대표 선수 시절 제8회 대통령기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미국 국가대표팀 코치, 미국태권도연합 초대 회장을 지냈다. 미국에서 '태권도 대부'라 불린 고(故) 이준구씨 못지않게 이름난 사범이다.

―태권도를 한 지 50년이 넘었지요?

"중학교 2학년 때 호기심으로 배웠고 춘천고 태권도부에 들어갔어요. 육군 대표 선수로 경험을 쌓으면서 도전 정신과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1974~79년엔 동두천 미2사단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일하며 '내가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구나. 좋은 사범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태권도 보급하러 기회의 땅으로 떠났지요."

―미국 도장은 처음부터 잘됐나요.

"저라고 왜 헛발질이 없었겠어요. 1980년대 말 시러큐스에 첫 도장을 냈는데 잘되니 욕심이 났지요. 제자한테 맡기고 하나를 더 차렸습니다. 그런데 이쪽에서 가르치면 저쪽이 안되고 저쪽으로 옮기면 이쪽이 덜컹거리는 거예요. 11개월 만에 폐업하고 말았지요. 10만달러를 잃고 KO패를 당한 셈입니다. 하지만 훨씬 값진 교훈을 얻었어요."

―10만달러 날리고 배운 게 뭡니까.

"성공이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시행착오를 계기로 경영을 공부했어요. 마케팅, 세일즈, 직원 관리…. 이번에 한국체대·용인대·경희대 등 다섯 곳을 돌며 태권도 전공생들에게도 강조했습니다. 태권도 세일즈할 자신이 없다면 좋은 사범이 될 수 없다고."

―사범한테 영업까지 하라고요?

美 태권도 마스터 정순기 관장
정순기 월드클래스 관장이 승단 심사를 하고 있다. 수련생의 30%가 성인이다. / 정순기 제공
"처음엔 거부감이 들겠지만 한번 생각해보세요. 태권도 수련이 얼마나 좋은지, 왜 필요한지 확신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좋은 태권도 사범이 될 수 있을까요? 영업 직원을 뽑아도 되지만 그것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사범은 언제 누구한테든 좋은 세일즈맨이 될 수 있는 소양을 지녀야 해요."

―저한테 즉석 영업을 해보신다면.

"몇 시에 귀가하나요? 일주일에 두 번은 일찍 정리하고 들어가면 안 될까요?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려면 건강도 챙기고 스트레스도 풀어야 합니다. 태권도가 좋은 운동이에요. 온몸을 활용하며 정신을 집중하니까요. 저는 그 수련 시간을 '일상의 휴가'라 부릅니다. 태권도를 하면 몸과 자신에 대해 파악할 수 있어요. 강습료(1개월 185달러)도 비싸지 않아요.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투자하면 삶이 달라질 겁니다…."

"항상 좋은 차렷을 하는 것"

하마터면 등록하겠다고 할 뻔했다. 정 관장은 "태권도 수련은 블랙벨트(검은띠)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게 아니라 일종의 사회체육"이라며 "몸을 쓰면서 배우는 기쁨이 있고 우렁찬 기합을 넣고 몰입하며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다"고 했다.

―10년 넘게 다니는 성인 수련생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장·청소부·의사 등 직업이 다양해요. 흰 도복을 입으면 다 같은 수련생입니다. 띠대로 서서 겨루기도 하며 관계를 맺지요. 태권도를 하면 업무나 공부 효율이 더 올라간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수련 가치에 더 충실하기 때문이에요. 태권도는 심신을 단련하는 무술입니다. 줄 서기만 해도 자신을 점검할 줄 알게 돼요. 성실과 인내도 배우지요."

―다른 운동은 안 되나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태권도는 온몸으로 공방(攻防)의 기술을 수련하기 때문에 체력은 물론 절제, 존중, 자신감, 책임, 협조 등 여러 인성 덕목을 기르기 수월하지요. 도장은 저학년 아이들 돌보며 놀아주는 곳이 아녜요. 한국 도장들이 변질된 것은 현실과 타협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제 철학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이번에 확인했어요."

―어떤 변화가 필요합니까.

"겨루기는 서로 좋은 파트너가 되어주는 훈련입니다. 그 귀한 가치를 왜 버리나요? 단계에 맞게만 하면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도장들이 놀이가 아닌 수련, 즉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럼 수련생도 중·고생과 성인으로 넓어질 겁니다. 아이들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하고요."

―과소평가라니요?

"사범이 '이건 위험할 거야' '애들인데 이 정도면 됐지' 하며 피하는 건 반(反)교육입니다. 일곱 살 꼬마도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해요. 도장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끌어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주신다면.

"승급 심사를 받는 열두 살 소년에게 목표가 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항상 좋은 차렷을 하는 것'이라는 답을 듣고 깜짝 놀랐지요. 스승인 제가 거꾸로 제자에게 배웁니다. 속단하지 말아야죠. 뭔가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 출발선에 서서 시동을 걸기 직전의 마음가짐, 그 초심을 늘 가다듬으려고 애쓴다면 도장 밖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해요."

베스트 파트너란?

지난 40년간 정 관장에게서 배운 수련생은 어림잡아 몇만 명이다. 그가 경험과 노하우를 담아 '위대한 수업: 월드클래스 따라잡기'(공감의기쁨 刊)를 최근 펴냈다. 여덟 살 때부터 도장에 다녔고 4년 전부터 보조 사범으로 일하다 올가을 하버드대에 진학하는 제자 이야기도 실려 있다.

―성공 사례가 다양하더군요.

"핵심은 열정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사범이 되려고 노력하면 수련생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배려하며 이해의 폭도 넓어져요. 수련생이 태권도를 삶의 터닝 포인트로 삼는 경우도 있고요."

―언제 보람을 느끼나요.

"나이나 직업·재능과 관계없이 태권도를 배우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때입니다. 눈빛이 반짝거려요. 흰띠로 입문할 땐 유단자의 솜씨를 보고 '내가 저걸 할 수 있을까' 싶지만 1~2년 계속하면 반쯤은 할 수 있고 마침내 검은띠를 매게 됩니다. 설정해둔 한계를 스스로 깨고 나오는 과정과 같아요. 그런 경험이 태권도가 아닌 다른 일에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지요."

―띠별로 칭찬의 기술도 다른가요?

"태권도에서 띠는 동기부여입니다. 흰띠엔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하며 가능성을 심어줘요. 파란띠는 1년쯤 배워 좀 지루해지고 계속해야 할지 의심이 생기는 구간입니다. 인내가 필요할 때이니 '잘해왔잖아. 더 할 수 있어'라고 격려해요. 빨간띠엔 책임감, 검은띠엔 리더십을 키워주려고 합니다."

―강의는 어떻게 채우나요.

"성인의 경우 50분 강의입니다. 10분간 몸을 풀고 서로 마주 보게 해요. 인사를 하고 발차기에 들어갑니다. 차고 나서 빠지고 주먹도 지르고. 그걸 '파트너 드릴(연습)'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겨루기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품새(공방의 기본 기술)를 가르치고요."

―파트너에는 '그냥 파트너' 'OK 파트너' '베스트 파트너'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남에게 베스트 파트너가 되려고 힘쓰면 나도 베스트 파트너를 만날 확률이 높아져요. 내가 재빨리 좋은 동작으로 반격하는 연습을 하려면 상대가 좋은 공격을 해줘야 하니까요. 태권도를 잘하는 사람치고 좋은 파트너가 아닌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상대가 기분 좋게 훈련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사람, 그게 베스트 파트너예요. 직장과 가정에서도 적용될 겁니다."

살다 보면 강한 상대, 사나운 일을 만난다. 겨루기도 전에 기가 꺾일 때도 있다. 선수 시절 상대의 공격을 기다렸다가 받아치는 걸 좋아했다는 정 관장은 "참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용기"라며 "그 바탕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했다. 태권도 종주국이 잃어버린 오래된 미래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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