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린 해삼과 동그란 오향장육 살짝 올려… 특제 땅콩소스로 육수에는 '활기찬 寒氣'

조선일보
  • 정동현
입력 2019.06.15 03:00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중국냉면편

서울 강남구 '차이린'

정동현
중국집 앞 '냉면 개시'라는 글자가 명조체로 또박또박 적힌 빨간 깃발이 달렸다. 여름이 오고 있다는 뜻이다.

어릴 적 부산에서 차가운 국수를 먹으려 하면 밀면과 중국냉면밖에 없었다. 그윽한 메밀향 운운하는 평양냉면은 스무 살이 훨씬 넘어 서울에서 처음 먹어봤다. 중국집에서 팔던 냉면은 어린 나에게 요상한 맛이었던 것 같다. 혀를 움츠리게 하는 새콤한 맛. 그 밑에 깔린 팔각·정향·회향 등 중식의 오향(五香)은 부산 앞바다가 아닌 저 멀리 대륙을 연상케 했다. 그 아리송한 느낌은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그릇 내노이소"라고 말하며 배달과 요리를 혼자 도맡던 얼굴 까만 중국집 주인장도, 몇 달에 한 번 중국집에 전화를 걸던 어머니도 맛의 이유를 따지기엔 모두 너무 바빴고 또 그만큼 고달팠다.

중국냉면도 짜장면처럼 한국에만 존재하는 중식 아닌 중식이다. 아마 땅이 워낙 넓으니 중국에도 냉면 비슷한 게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서늘한 정도로 면을 식혀 먹는 경우는 있어도 한국처럼 육수에 얼음까지 띄우는 음식은 없다는 게 업계의 통설이다. 기록을 쫓아 올라가면 해방 이후 중국냉면이란 말이 처음 나타났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서울 삼성동의 ‘차이린’은 보기 드물게 중국 냉면에 힘을 주는 식당 중 하나다. 처음에는 기본 육수만으로 오향장육, 해삼과 즐긴다. 땅콩소스를 풀면 직선적인 맛에서 풍성한 느낌으로 변한다. 냉면과 매콤한 ‘돼지갈비튀김’을 곁들여 먹노라면 여름이 왔다는 기분이 든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삼성동의 ‘차이린’은 보기 드물게 중국 냉면에 힘을 주는 식당 중 하나다. 처음에는 기본 육수만으로 오향장육, 해삼과 즐긴다. 땅콩소스를 풀면 직선적인 맛에서 풍성한 느낌으로 변한다. 냉면과 매콤한 ‘돼지갈비튀김’을 곁들여 먹노라면 여름이 왔다는 기분이 든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50년 정도로 역사가 짧은 음식이지만 중국냉면은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냉면 빼고는 '시즌 메뉴'를 찾기 어려운 한국에서 말이다. 그런데 딱 여름 한 철만 팔다 보니 맛에 힘을 주는 집이 많지 않다. 그 몇 안 되는 집 중 하나가 남대문 '홍복'이다. 4층 건물을 올린 '홍복'은 1958년 부산에서 문을 연 뒤 1970년대 말 지금 위치로 이사 온 유서 깊은 집이다. 시장에 들른 객들은 짜장면 한 그릇 단출히 먹고 일어서지만, 샥스핀까지 나오는 고급 코스 요리를 먹으러 일부러 찾는 이도 많다. 특히 걸걸할 정도로 빨간색을 머금은 짬뽕은 해장 겸 식사를 해치우려는 중년 남성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이 집은 중국냉면도 다른 식사 메뉴처럼 기본에 충실하다. 모양을 살피면 달걀 지단, 새우, 오징어, 해파리냉채가 얌전히 올라가 있다. 갈색 빛을 띤 육수는 오향장육을 먹을 때 입속에 퍼지는 오향의 존재감이 역력하다. 여기에 땅콩버터가 아닌 이 집에서 직접 만드는 땅콩소스를 취향껏 넣는다. 전체적으로는 통통 튀듯 경쾌하다기보단 위장 끝까지 찬기운을 밀고 들어가는 묵직한 느낌이 더 강하다. 사대문 안에 단단히 입지를 다진 집답다.

서울 지하철 9호선 삼성중앙역으로 가면 전통이 아닌 중국 본토를 표방하는 '차이린'이 있다. 경기고로 올라가는 언덕에 있는 이곳은 탕수육·깐풍기 같은 일반적인 메뉴도 사랑받지만,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중국 요리로 더 널리 알려졌다. 닭고기를 차갑게 식혀 고추기름을 두른 '구수계'나 달걀흰자와 함께 해물 등을 볶은 '광동오슬', 그리고 돼지갈비를 짧게 잘라 한입 크기로 튀겨 매콤하게 볶은 '돼지갈비튀김' 등이 손으로 꼽힌다. 한철 내놓는 중국냉면도 격이 꽤 높다. 불린 해삼과 동그랗게 말아 썬 오향장육이 올라가 있는 냉면은 그 빛이 꽤 어둡다. 맛을 보면 닭 대신 해산물과 채소로 맛을 낸 육수의 경쾌한 느낌이 주를 이룬다. 일본 소바 국물 같이 혀를 잡아당기는 감칠맛도 두드러진다. 이 집에서 만든 땅콩소스를 풀면 맛의 양상이 전혀 달라진다. 간장과 식초가 직선으로 쭉 내딛는다면 땅콩소스는 맛에 양감(量感)을 불어넣는다. 날카로운 창 같던 육수에 동글동글 개구진 활기가 돈다. 원조라는 말처럼 무겁고 각 잡힌 느낌은 이 음식에 없다. 본래 지겹도록 더운 한반도 여름이 이끈 혁신이라고 말하면 적절할까. 전통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시원한 또 다른 냉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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