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참을 수 없이 가려운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조선일보
입력 2019.06.14 03:15

'백두칭송위원회' 등 만들어 北 정권 칭송하는 대학생 단체
한국·대학생·진보 모두 모욕… 차라리 '김정은찬양연합'으로

한현우 논설위원
한현우 논설위원

군대 다녀와 복학한 1990년대 초, 학생 시위대 속에서 뉴욕 양키스 로고가 박힌 야구 모자를 쓴 사람을 발견했다. 나는 주사파도 아니고 핵심 운동권도 아니었지만, 그 이율배반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직 학생운동 기저에 반미(反美)주의 또는 적어도 패션으로서 반미주의가 남아 있던 때였다. 모자에 '양키 고 홈'이라고 쓰고 다닐 것까지야 없었지만 양키스 모자를 쓴 학생 시위대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날 친구들과 그런 주제를 놓고 막걸리를 마시며 세대 차이 운운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모이지 않는다. 회장이나 의장 같은 리더도 없다. 문제를 인지한 시점에 소셜미디어에서 동시다발로 뭉쳐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전대협이니 한총련이니 하는 단체가 학생운동을 이끌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이 요즘 방식의 학생운동이요 시위이며, 그 효과는 이전 세대 못지않다. 양키스든 다저스든 좋아하는 모자를 쓰는 것과 어떤 사회적 주장 사이에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이것은 세대 차이로 설명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주 고전적인 방식의 학생운동 단체가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백두칭송위원회니 위인맞이환영단이니 하는 걸 만들어 낸 대학생 단체다. 이들도 소셜미디어를 이용하지만, 거리에서 플래카드 시위를 하고 세미나니 토론회도 연다. 이런 방식의 학생운동이 거의 사라져 버린 시대이다 보니 이들이 눈에 더 잘 띈다.

작년 말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들이 김정은의 서울 방문을 고대하고 환영한다면서 춤추고 노래 부를 때만 해도 무슨 행위예술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들이 '김정은이 왜 위인인가'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이어 며칠 전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 발표대회'란 걸 열었다. 김정은이 "북한의 모든 주민에게 크나큰 지지를 받고 있다"거나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펼친 세심함" 같은 발표가 이어졌다. 김정은이 한 말을 가사로 지은 노래도 불렀다. 한 편의 '김정은 학예회' 같았던 이날 심사위원장이란 사람은 "시대의 올바른 요구를 담고 있고, 김 위원장의 풍모를 잘 얘기하고 있다"고 평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열이 좀 많은 게 아니라 아주 아픈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니, 김정은을 위인 아니라 신선으로 모신다 해도 별일 다 있구나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들 이름이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다. 한국과 대학생과 진보가 다 부끄러워할 이름이다. 이들은 김정은 발표 대회를 알리면서 "북한을 잘 알아야 통일을 앞당길 수 있고, 북한을 알기 위해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은 김정은의 '겸손함'을 주장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만났을 때 '나는' 대신 '저는'이라고 했고, 숙소와 대접이 변변치 못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북한 지도자의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다. 우수상 수상자는 김정은의 "티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이 "주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김정은을 잘 아는 것'과 정반대로 갔다.

이것은 종북(從北)이 아니라 무지(無知)다. 대학생답지도 않고 진보적이지도 않다. 학생운동이 아무리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지만, 이런 주장이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란 이름을 달고 등장하는 게 너무 가렵고 불편하다. 그러니 부탁건대, 무슨 주장을 하든 상관없으니 단체 이름만이라도 '김정은찬양연합' 같은 것으로 바꿔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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