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지난 4~5일 한국 삼성과 SK하이닉스를 포함한 글로벌 IT 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미국의 대중 압박에 협조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반면 미 국무부는 이날 "한·미의 경제와 안보에 수십년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5G 인프라에 대한 조달 결정에서 외국 정부의 불법적이거나 통제되지 않는 강요를 받게 될 위험이 있는 화웨이와 같은 (장비) 공급자들의 위험성을 엄격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내 화웨이 장비가 한·미 군사안보 분야에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한 지난 7일의 청와대 논평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의에 "안보에 영향이 있다"는 취지로 경고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NYT에 따르면, 중국의 면담 대상에는 한국의 두 기업 외에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와 델, 영국 반도체 설계업체 ARM 등이 포함됐다. 국무원 국가개발개혁위원회가 주도한 이번 면담에는 상무부와 공업정보화부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중국 측은 이 자리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과 거래 금지 조치에 협조하면 심각한 결과(dire consequences)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해외 기업들의 탈(脫)중국 움직임에 대해서도 "표준적인 다각화 차원을 넘어서는 어떠한 해외 이전 움직임도 처벌(punishment)에 직면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중국은 미국 기업에 대해서는 "대중(對中) 거래 배제 정책을 따르면 '영구적인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협박하고, 비(非)미국 기업들엔 "지금처럼 중국 기업에 대한 공급을 정상적으로 지속하면 불리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NYT는 전했다.
미국은 미국대로 한국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고 나섰다. 미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8일 지난주 청와대의 화웨이 관련 입장에 대한 본지 논평 요청에 "동맹국의 네트워크가 취약하다면 그 취약성은 미국에도 위협을 가한다"며 "네트워크에 신뢰할 수 없는 공급자가 있다면 우리의 동맹국 및 파트너와 그런 (기밀) 정보를 어떻게 공유할지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심각한 국가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파트너 및 동맹국들과 협력을 환영한다"라고도 했다.
미·중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우리 편에 서라'고 한국 기업을 압박하는 상황이지만 청와대와 외교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주중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은 9일 우리 기업이 중국 당국에 불려가 협박당한 것과 관련, "NYT 보도를 보고 알았다"며 "아직 이렇다 할 입장이 없다"고 했다. 청와대와 외교부도 "기업들이 알아서 할 문제" "기업 간 의사 결정에 정부가 일일이 개입할 수는 없다"는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정부가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하고 있지만, 미·중 분쟁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은 외교부 내 미·중 전담 태스크포스(TF)를 신설하겠다고 한 것이 거의 전부다.
앞서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 7일 브리핑에서 미국의 '반(反)화웨이' 캠페인에 대해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고 했고, 같은 날 청와대 다른 관계자는 "(화웨이 장비가 쓰이는) 5G는 군사·안보 통신망과는 확실히 분리돼 있다"며 "한·미 군사·안보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고 했다.
IT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기업들로서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 날까 봐 입장을 밝히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 IT 업계는 이번 화웨이 관련 미·중 무역 전쟁에서 자칫 발을 헛디딜 경우 2016년부터 시작된 '중국발 사드 보복' 같은 압박이 재연될까 우려하고 있다. IT 업체의 한 임원은 "대중 매출 비중이 높은 한국 기업들의 경우엔 어느 한쪽 편에 서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미·중 간 갈등이 한국 기업에 불똥 튀지 않도록 우리 정부가 외교력을 총동원해 주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