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투 특수훈련' 했던 美·광복군, 김원봉은 배제

조선일보
입력 2019.06.08 03:00

[김원봉 논란] 광복군에서 김원봉의 위상
美, 당시 조선의용대 신뢰 안해… 부대원도 해방 직전 50명에 불과

美·김구 ‘한반도 침투작전’ 회의 - 1945년 8월 광복군과 미군의 국내 침투 작전 회의 후, 김구 주석과 미 전략정보국 도너번 장군이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두 사람 가운데 이범석(흰옷) 광복군 제2지대장.
美·김구 ‘한반도 침투작전’ 회의 - 1945년 8월 광복군과 미군의 국내 침투 작전 회의 후, 김구 주석과 미 전략정보국 도너번 장군이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두 사람 가운데 이범석(흰옷) 광복군 제2지대장. /국사편찬위원회
문재인 대통령은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돼 마침내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며 "통합된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가 국군과 한·미 동맹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들어온 것은 1942년 여름이었다. 임시정부를 줄곧 비판했던 김원봉은 1930년대 말 중국 장제스 정부로부터 임정과의 항일 합작을 종용받았지만 뿌리쳤다. 그러나 장제스 정부가 재정 지원을 임정으로 단일화한다는 방침을 밝히자 뜻을 굽혔다. 게다가 1941년 6월 조선의용대 병력의 80% 이상인 화북지대가 중국 공산당 관할 지역으로 넘어가자 그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할 수 없이 광복군에 합류했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뒤에도 광복군 주류와 섞이지 않았다. 병력도 해방 직전 제1지대(50여 명)는 제2지대(200여 명), 제3지대(300여 명)에 비해 떨어졌다. 미국은 조선의용대 출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1945년 봄 미국 OSS(전략정보국)가 한반도 침투 특수훈련을 실시했을 때 대상자들은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에서 선발됐다. 미군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이범석 제2지대장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었다.

국군 창설에 기여한 광복군도 제2지대와 제3지대 출신이었다. 특히 제2지대는 이범석을 중심으로 강한 결속력을 보여서 환국 후 우파 청년운동을 벌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적극 참여했다. 이범석이 대한민국 초대 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되자 육군사관학교에 대거 입교하여 훗날 국군의 중추가 됐다. 반면 제1지대 출신으로 국군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한 사람은 없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광복군에 뒤늦게 가담해 별 역할도 없었던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부각시키는 것을 지청천과 이범석 등 광복군 핵심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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