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천황'과 친일파

입력 2019.06.08 03:09

황제 아닌데 '천황'이라는 일본… 그래도 '일왕'은 우리만 쓰는 말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 이봉창 의사도 '천황' 호칭

김수혜 사회정책부 차장
김수혜 사회정책부 차장

오는 10월 나루히토 일왕(日王)의 공식 즉위식이 열린다. 일본 정부는 한국·미국·중국 등 195개국 정상을 초청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중 하나다.

문 대통령이 그 행사에 참석한다고 '친일파'라고 욕할 우리 국민은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이미 한 차례 일왕을 천황이라 부르며 즉위를 축하하는 편지를 보냈다.

상식적인 국민은 그 편지를 문제 삼지 않았다. 과거사와 별개로 지금 한·일은 미국을 가운데 두고 손잡은 간접적인 동맹국이다. 한국 안보는 한·미 동맹 없이 불가능하고, 한·미 동맹은 미·일 동맹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그런 나라의 실권 없는 군주에게 국민을 대표해, 국익을 위해, 관례에 따라 그 나라 호칭을 써서 예를 표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렇게 했다. 문 대통령이 일왕이란 말을 썼다면 그게 되레 의미 없는 외교 참사였을 것이다.

일왕은 최근 30년간 새로 생긴 한국어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장이 "세계에서 우리만 쓰는 말"이라고 했다. 미국도 중국도 대만도 동남아도 안 쓴다. 태국은 자국 왕은 '크삿(왕)'이라고 쓰면서 일왕은 '차크라팟(황제)'이라고 쓴다.

일본 공산당은 2004년까지 군주제 폐지를 당 강령에 명기했다. 지금도 '정세가 무르익었을 때 국민의 뜻에 따라 존폐를 해결해야 할 대상'이라고 본다. 그들도 '천황제가 문제'라고 하지 '일왕제는 문제 있다'고 하지 않는다. 한자를 보여주지 않는 한 일본인은 '일왕(니치오·日王)'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한 세대 전까지는 우리도 일왕을 천황이라 불렀다. 그 시절이라고 애국심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식민통치를 몸으로 견딘 사람은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 더 많이 살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왕 마차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1900~1932) 의사도 김구 선생을 만났을 때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천황을 안 죽이오?"라고 물었지 "왜 일왕을 안 죽이오?" 하지 않았다.

일왕이란 단어는 1989년 전후 퍼지기 시작했다.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교과서 왜곡 문제가 잇달아 불거진 시기였다.

초기엔 천황이란 말과 혼용되다 점차 일왕이 천황을 밀어냈다. 다만 자세히 보면 이런 변화는 꼭 보편적이지 않았다.

지금도 한국인 대다수는 일상에서 일왕보다 천황이란 말을 더 많이 쓴다. 좌파건 우파건 전문가 대다수도 논문 쓰고 토론할 때 천황이라고 하지 일왕이라고 하지 않는다.

역대 정부도 줄곧 천황이란 말을 썼다. 1998년 박지원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상대국 호칭 그대로 불러주는 게 관례"라고 정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전임 일왕과 만나 "천황께선 역사에 조예가 깊으신 것으로 안다"고 덕담했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일왕이란 단어는 정확히 말해 '언론 용어'"라고 했다. 이 말은 학자가 논문 쓸 때 쓰는 말도, 외교관이 외교할 때 쓰는 말도 아니다. 한국인이 일본인과 대화하며 쓰는 말이 아니라, 한국인끼리 한국말로 한국 매체에 글 쓸 때 '나는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표시 내는 말이다.

우리에게 천황은 괴로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말이 안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한 나라의 군주가 왕(king)이고, 여러 왕을 거느린 군주가 황제(emperor)다. 일본은 20세기 초반 수십년을 제외하곤 제국이었던 적도 없으면서 고대부터 자기네 군주를 천황이라 불러왔다.

그래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됐다. 대통령은 일왕을 천황이라고 부르는데, 언론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쓴다. 이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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