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과학 대신 정치가 작동하는 재난 사고 대응

조선일보
입력 2019.06.06 03:17

지구 반대편 선박 침몰 현장에 "속도 중요하다"며 구조 지시
세월호 때 "대통령 뭐 했나" 비난, "똑같은 빌미 줄라" 강박 아닌가

김창균 논설주간

헝가리 유람선 사고 소식이 전해진 아침 문재인 대통령은 "중요한 것은 속도"라며 "해군과 해경 등 구조 인원과 장비를 최대한 빨리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사고 발생을 보고받은 시점과 구조 지시 시점을 수사 결과 브리핑하듯 소상히 밝혔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을 보고받은 박근혜 대통령은 "해경과 해군의 인력과 장비, 인근 모든 선박 등을 최대한 동원해 구조하라"고 지시했다. "여객선의 객실과 엔진실까지 철저하게 확인해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도 했다. 대통령의 호령이 떨어지자 "소방 10대, 해경 5대, 해군 1대, 경찰 2대 등 헬기 18대와 해경 25척, 해군 8척, 소방 1척 등 선박 34척이 인명 구조 활동에 투입됐다"는 보도 자료가 나왔다. 정작 제시간에 도착해 구조 활동을 편 건 해경 경비정 1척, 고무보트 1대, 헬기 3대뿐이었다. 대규모 구조 활동이 펼쳐지는 줄 알았던 가족들은 뒤늦게 실상을 알고 분노했다.

세월호가 뱃머리만 남기고 완전 침몰한 건 오전 10시 20분이었다. 대통령이 첫 보고를 받은 오전 10시는 골든 타임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더구나 수백㎞ 떨어진 현장 상황을 모르고 내리는 대통령 지시는 아무 실효성이 없었다.

재난 구조는 현장을 수백, 수천 번 경험한 전문가에게 지휘를 맡겨야 한다. 그의 지시를 받는 구조대원들이 평소 훈련으로 근육에 기억된 매뉴얼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분초 단위로 사라지는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는다. 노트르담 성당 화재 때 소방관과 경찰관들은 230년 전 프랑스 대혁명 때 만들어진 화재 대응 매뉴얼 순서에 따라 가시면류관을 비롯한 수십 점의 귀중한 유물을 건졌다. "15분, 30분만 늦었으면 모든 걸 잃을 뻔했다"고 한다. 마크롱 대통령이 "모든 구조 인원과 장비를 최대한 빨리 투입하라"고 지시한 덕분이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문 대통령의 속도전 구조 지시에 한국당 대변인이 "골든 타임은 3분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이 논란을 일으켰다. 가족들 심정을 헤아리지 않은 정치 공세라는 것이다. 세월호 때 청와대 대변인으로서 똑같은 대통령 지시를 전달했던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지적도 있었다. 다만 지구 반대편 선박 침몰 현장에 "속도가 중요하다"며 구조대를 보내는 대통령 지시에 고개를 갸우뚱한 사람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 일주일 후 조선일보에 소방청 고위 관계자의 인터뷰가 실렸다. 당시 기자가 보내왔던 초고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고 첫날 도착한 해역에 뒤집힌 세월호 뱃머리가 보였다. '이미 다 끝났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밥이 없으면 3주, 물이 없으면 3일을 버티지만 공기가 없으면 3분이 한계다. 이미 3분이 지난 지 오래였다." 전문가의 경험이 녹아 있는 솔직한 토로였지만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희생자 가족들이 정부에 속았다며 분노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구조 책임자가 사고 첫날 "이미 끝났다"고 판단했다는 인터뷰가 나가면 당사자가 큰 곤경을 치를 게 뻔했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표현으로 바꿔 기사를 출고했다.

인터뷰 속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구조는 과학이다. 과학으로 분석해서 사실대로 말해줘야 거짓말이 거짓말을 만들지 않는다." 세월호 사고 초기 정부는 상황 파악도 못 하고 허둥댔다. 가능한 일과 가능하지 않은 일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당장의 비난을 피하려고 눈속임하기에 바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전문가들이 입을 다물자 얼치기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무책임한 주장이 구조 현장을 흔들었다. 세월호는 대통령 공격 소재가 됐다. 대통령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가리지 않았다. 세월호는 대한민국의 재난 사고 대응을 과학 대신 정치로 바꿔 버렸다. 그래서인지 재난 사고, 특히 선박 침몰 사고가 터질 때마다 문 대통령이 보이는 반응에는 어떤 강박이 느껴진다. 전임자가 시달렸고 자신은 정치적 수혜를 누렸던 '대통령은 그때 무얼 했느냐'는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헝가리 유람선 사고 소식에 총리는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가족들께도 마음의 위로를 드린다. 외교부는 현지 공관을 중심으로 헝가리 관계 당국과 협의해 최선을 다해 지원해 달라"고 했다. 대통령도 '속도전 지시' 대신 이런 메시지를 내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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