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瓷器)는 중국 문화의 상징이라 일컫는다. 그 시작은 강남 지방 월주요(越州窯)에서 탄생한 청자로, 이후 오랜 세월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그런데 남송 때에 이르러 예상치 못한 적수가 나타났으니 바로 고려 청자였다. '비색(翡色) 청자가 날로 정교해진다'거나 '고려 청자는 천하제일로 다른 곳에서 모방할 수 없다'는 남송 사람들의 찬탄이 나오기도 했다.

고려 왕실이나 귀족 저택에서는 일상용 그릇뿐만 아니라 촛대나 베개도 청자로 만들어 썼다. 심지어 '고려사'에는 의종 때에 궁원(宮苑)에 '양이정'이라는 건물을 지으면서 지붕을 청자로 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고려 사람들의 청자 사랑은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

청자 참외 모양 병 조각, 사당리 가마터, 국립중앙박물관.

최고급 고려 청자의 제작지를 찾으려는 노력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됐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64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러한 궁금증이 한꺼번에 풀렸다. 그해 5월 국립박물관 조사팀은 전남 강진군 사당리에서 청자 가마터를 찾아냈고 9월 22일 발굴을 시작해 궁궐에 쓰인 청자 기와를 비롯한 최고급 고려 청자를 다수 수습하였던 것이다.

발굴은 1977년까지 9차에 걸쳐 진행됐다. 그 사이 출토된 유물은 병, 주자, 촛대, 벼루, 향로, 베개, 바둑돌 등 10만점이 넘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청자 병이었다. 비록 파편일지라도 활짝 핀 참외꽃 모양 입술, 잘 익은 참외처럼 팽팽한 양감을 지닌 몸체에 주름치마 모양 받침을 갖추었다. 최고의 비색 청자로 이름 높은 국보 94호 참외 모양 병을 빼닮은 것이었다.

이 발굴을 통해 고려 왕실에서 쓴 청자를 강진 사당리 일대에서 구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개경에서 사용할 청자를 왜 이토록 먼 바닷가에서 구웠을까. 그것은 사당리 일대가 청자 생산에 필요한 좋은 흙, 풍부한 연료를 갖추었기 때문이며 그에 더해 청자를 수송하기 편리한 해상 교통 요지라는 점도 고려됐다. 그런 천혜의 자연 조건에 장인들의 노력이 더해져 '천하제일 고려 청자'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