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결정은 자기가 해놓고 책임은 아래에 묻는 김정은

조선일보
입력 2019.06.03 03:19

김정은이 최근 현지 시찰을 하면서 "일꾼(간부)들의 일 본새(일하는 자세와 태도)가 정말 틀려먹었다"면서 "기분이 좋지 않다. 대단히 실망하게 된다"고 말했다고 북한 관영 통신이 전했다. 지난달 초 미사일 발사 실험을 참관한 후 자취를 감췄다가 3주 만에 나선 공개 행보에서 강도 높은 질타부터 시작한 것이다.

며칠 전 노동신문은 "앞에서는 수령을 받드는 척하고 뒤에서 딴 꿈을 꾸는 반당적, 반혁명적 행위는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고 했다. 노동신문이 '반당, 반혁명'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숙청에 대한 예고탄 혹은 이미 숙청이 끝났다는 발표다. 6년 전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할 때도 똑같은 표현이 등장했었다.

4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협상 담당자들이 이미 숙청됐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실무 협상을 맡았던 김혁철은 처형설까지 돌고 협상을 총괄했던 김영철 통일전선부장과 다른 실무자들은 강제노역형을 받거나 수용소에 보내졌다는 것이다. 북은 김정은 한 사람의 결정과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다. 하노이 회담을 앞둔 미·북 사전 접촉 때 김혁철은 "핵 문제는 최고 존엄만 결정할 수 있다"며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북의 지방 관리들은 김정은이 현장지도에서 하는 말을 깨알처럼 받아 적었다가 다음 지도 때 그 지시 이행 사항을 보고한다. 김정은은 이렇게 만사를 자신이 결정해 놓고도 하노이 회담이 제 뜻대로 안 되고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그 책임을 아랫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다.

정부는 김정은이 주민들을 잘살게 해주기 위해 핵 포기를 결심했다는 믿음에 철석같이 매달려 왔다. 대통령은 "김정은이 북을 정상 국가로 이끌려는 큰 결단을 내렸다"는 확신을 밝혔고 총리는 "북에도 마침내 백성의 생활을 중시하는 지도자가 출현했다"고 했다. 여권의 차기 주자로 꼽히는 인사는 "큰 기업 2, 3세 경영자 중 김정은만 한 사람이 있느냐"고 했다.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대북·외교 정책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김정은에 대한 허황된 시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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