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사 '그루밍 성폭행' 논란…의사와 환자, 지휘·감독 관계일까

입력 2019.06.01 14:22

정신과 전문의 김현철씨가 환자들을 상대로 ‘그루밍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들은 형사고소나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김씨의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네티즌들도 "명백한 범죄다. 강간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루밍 성범죄라는 게 입증될 수 있을까.

법조계에서는 현행 법체계 상 김씨를 성폭행 혐의로 처벌하는 것은 법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는 것이어서 처벌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일러스트=정다운
일러스트=정다운
◇피감독자간음 주장…안희정도 같은 혐의로 항소심서 실형
김씨를 둘러싼 의혹은 지난 28일 MBC ‘PD수첩’ 방영 이후 증폭됐다. PD수첩은 김씨가 환자들에게 그루밍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다뤘다. 김씨가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들에게 호감을 얻고 돈독한 관계를 만든 뒤 이들을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 성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방송에서 환자 A씨는 "김씨가 제안한 일본 여행을 따라갔다가 성폭행은 당했고,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성관계를 제안했는데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환자 B씨는 "김씨에게 호감을 표시하자 김씨가 성관계를 제안했다"며 "이를 거부하지 못하고 치료 기간 중에도 다섯 차례 이상 성관계를 가졌다"고 했다.

이들은 김씨가 피감독자간음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형법은 이를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신의 수행비서인 김지은씨와 성관계를 가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받았던 혐의다. 그는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안 지사는 자신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김씨를 의사에 반해 간음·추행했다"며 "안 지사는 김씨가 자신의 비서이면서 별정직 공무원이라는 신분상의 특징때문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취약한 처지를 이용해 김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했다.

반면 1심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씨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김씨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 당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이 범죄는 피해자가 업무나 고용 등의 관계에서 보호·감독을 받았다는 사실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위계·위력을 행사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입증돼야 한다. 위력이란 지위나 권세 등을 이용해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하는 행위이고, 위계란 치료를 빙자해 간음하는 등 상대방을 착오에 빠지게 해서 정상적인 판단을 못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대사 재직 중 함께 일하던 여직원과 성관계를 맺은 김문환 전 에티오피아 주재 대사도 피감독자간음 등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위력은 사회적 지위와 상하 관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물리적인 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피해자는 김 전 대사의 지휘·감독을 받는 지위에 있었고, 성관계 당시 ‘이러지 말라’고 하는 등 소극적 저항을 했다"고 했다.

 정신과 전문의 김현철씨./MBC PD수첩 캡처
정신과 전문의 김현철씨./MBC PD수첩 캡처
◇의사-환자는 지휘·감독 관계?…"현행 법률상 포섭하기 힘들다"
김현철씨 사건의 경우, 의사와 환자 사이를 감독·지휘 관계로 볼 수 있는지, 또 이들 간의 성관계를 김씨가 위력이나 위계를 행사해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이다.

피해 여성 중 한 명은 지난해 2월 김씨를 고소했지만 검찰은 "성관계 사실은 인정되나 위력 행사 증거가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에 피해 여성은 올해 3월 고등검찰청에 불기소 처분이 잘못됐다며 항고했으나, 고검 역시 "세밀히 검토한 결과 항고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며 기각했다.

김범한 YK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환자는 언제든지 다른 의사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의사와 환자 사이를 감독·지휘 관계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라며 "설령 정신과 의사와 환자라서 지배관계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김씨가 여성들에게 위력 등을 행사했는 지가 불분명하다"고 했다. 그는 또 "예컨대 환자에게 최면을 걸어서 성관계를 가졌다거나, 성관계를 갖지 않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행동 등이 있어야 범죄가 성립될 것"이라고 했다. 채다은 법률사무소 월인 변호사도 "의사·환자 관계는 만남의 계기가 된 것이고, 그 이후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남녀관계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김씨가 ‘치료 일환으로 관계를 가져보자’고 말하는 것처럼 위계·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서로 좋아해서 합의 하에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보인다"고 했다.

김정연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법학 박사)은 "경우에 따라서는 미성년자나 장애인과 성관계를 가졌을 때 피해자의 동의가 있더라도 피감독자간음죄로 처벌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피해자가 미숙해서 의사표시를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며 "성인 여성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것만으로 장애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법을 너무 넓게 해석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위계·위력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지금 논란이 되는 사건을 현행 법률상으로는 포섭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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