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항복 소식에… 김구는 탄식하고, 이승만은 '내전'을 우려했다

입력 2019.05.29 03:01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10] 1945년 8월, 광복을 맞다

김구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1945년 8월 10일 저녁에 들었다. 중국 시안에서 산시성 주석 주사오저우(축소주)가 초대한 식사 자리였다. 후식으로 수박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를 마치고 나온 주사오저우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김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백범일지')

광복군은 미 전략정보국(OSS·CIA 전신)과 함께 국내에 침투하는 '독수리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은 중국 파견 미 육군정보국 디키 대령에게 미군과 광복군의 합작을 제안했다. 한인 청년들을 훈련시켜 연합군과 함께 국내 침투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위 사진은 1945년 11월 3일 환국 직전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이 마지막 청사인 충칭 연화지 청사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아래 사진은 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4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 창립을 위한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구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송헌주 이승만 이살음, 뒷줄 왼쪽부터 윤병구 정한경 유경상 임병직.
위 사진은 1945년 11월 3일 환국 직전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이 마지막 청사인 충칭 연화지 청사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아래 사진은 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4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 창립을 위한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구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송헌주 이승만 이살음, 뒷줄 왼쪽부터 윤병구 정한경 유경상 임병직. /국사편찬위원회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청년들도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장준하·김준엽 등 한국인 학병 50여 명은 각자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안휘성 임천에 있는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 모였다가 6000리(2356㎞) 길을 71일간 걸어 1945년 1월 31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했다. 이들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며 임정 청사로 행진했다.

김구는 환영회에서 감격에 겨워 말했다. "그동안 일제의 폭정 밑에서 온 국민이 모두 일본인이 된 줄 알고 염려했는데, 그것이 한낱 나의 기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왜놈들에게 항거하여 이렇게 용감하게 탈출해서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청년들 대표로 장준하가 답사에 나섰다. "저희들은 왜놈들의 통치 아래서 태어났고 또 그 밑에서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국기조차 본 일이 없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이 임시정부에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고 우리가 안으로 울음을 삼켜가며 눌렀던 감격, 그 태극기에 아무리 경례를 하여도 손이 내려지지를 않고, 또 하고, 영원히 계속하고 싶었습니다."('돌베개') 답사를 듣던 김구가 "흑!" 하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자 장내는 이내 울음바다가 됐다.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인 충칭 연화지 청사. 1995년 복원해 기념관으로 꾸몄다. 아래 사진은 1944년 4월부터 사용한 워싱턴 주미외교위원부 건물. 현재는 교회이다.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인 충칭 연화지 청사(위 사진). 1995년 복원해 기념관으로 꾸몄다. 아래 사진은 1944년 4월부터 사용한 워싱턴 주미외교위원부 건물. 현재는 교회이다. /이한수 기자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도 걱정이 앞섰다. 이승만은 8월 15일 임병직·장기영·한표욱 등과 점심을 함께하면서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이승만과 한미외교')고 말했다.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앞으로 벌어질 '내전'을 우려했다.

이승만은 미·소·중·영 정상에게 승전 축하 전보를 보냈다. 감사 인사와 함께 각 나라에 맞는 요청 사항을 적었다. 트루먼에게는 "우리에게 매여 있던 쇠줄을 벗게 된 데 대하여 미국에 영구한 감사를 지닌다"고 말하고 "우리의 민국 정부는 미국 제도를 모방하였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에게는 "3000만 한국인이 건설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국가 한국이 소비에트공화국과 극동 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안전장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장제스에게는 "중국과 한국은 동일한 전후 문제가 있으므로 밀접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영국 총리 애틀리에게는 "명목상의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을 노리개로 이용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면서 "독립된 통일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도와주기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러나 국제 정세는 '독립된 통일 한국'에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승만은 8월 21일 트루먼과 장제스에게 다시 전보를 쳤다. 장제스는 한국 독립에 지지를 나타냈지만, 트루먼은 답신하지 않았다. 트루먼에게 보낸 이승만의 전보는 "한국 국민은 미군만을 한국의 점령군으로 환영하고 있다. 한국 국민은 단일 민족인 자국민을 분열시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초래할 공동 신탁통치나 공동 위원단에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승만의 우려는 훗날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귀국을 서둘렀다. 하지만 비행편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해방 후 두 달 만인 1945년 10월 16일에야 김포 비행장에 내렸다. 수행원 한 명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김구의 환국은 더 늦어졌다. 임정 인사들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충칭에서 상하이를 거쳐 11월 23일 서울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33년, 김구는 26년 만의 귀국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는 더 큰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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