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이승만과 김구를 독립운동가로 만든 건 '을미사변'

조선일보
  • 이한수 기자
    입력 2019.05.29 03:01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이승만(1875~1965)과 김구(1876~1949)는 스무 살 무렵인 1895년 10월 일본이 저지른 민비 시해 사건(을미사변)을 계기로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이승만은 을미사변 직후 고종을 경복궁에서 탈출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에 연루돼 도피 생활을 했다. 김구는 이듬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쓰치다를 죽여 인천감옥에 투옥됐다.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서재필이 이끈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다.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하고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다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종신형이 선고됐으나 러일전쟁 발발 후인 1904년 8월 석방됐다. 옥살이를 하면서 저서 '독립정신' 등을 쓰고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를 문명 개화의 모델로 삼았다.

    이승만은 1904년 11월 대한제국 밀사의 사명을 갖고 미국을 향해 떠났다. 고종은 1882년 미국과 맺은 수호조약에 따라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리라는 희망을 걸었다. 이승만은 1905년 8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으나, 이미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용인한 상태였다.

    조지워싱턴대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1913년부터 교민이 가장 많이 사는 하와이를 근거지로 삼아 교육·언론 활동을 하고 파리강화회의 등 계기가 있을 때마다 미 본토로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펼쳤다.

    김구는 1895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의 황해도 신천 청계동 집에서 유학자 고능선에게 '주서백선' 등을 배우고 만주 일대를 여행하다 민비 시해 소식을 들었다. 일본인 살해로 투옥된 후 사형이 확정되지만, 고종의 특명으로 형 집행이 정지됐다. 1898년 3월 탈옥해 삼남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공주 마곡사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했다. 1903년 기독교 세례를 받고 황해도 장련 등에서 교육 활동을 펼쳤다. 1911년 안명근 등이 서간도 무관학교를 설립하려다 체포된 사건(안악사건)에 연루돼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옥중에서 활빈당 간부 '김진사'로부터 비밀결사 조직 방법 등을 배운 경험은 훗날 임시정부 경무국장 직책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출옥 후 변절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일제의 호적에서 벗어나고자 이름을 김구(金龜)에서 김구(金九)로 바꿨다. 또 가장 미천한 백성과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있어야 독립한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바람으로 호를 '백범(白凡)'이라 했다. 1919년 3·1운동은 김구가 직업적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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