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기업 회장이… 中정부 '6·25 항미'에 맞장구

입력 2019.05.28 03:01

[번지는 美中무역전쟁]
장교 출신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상감령' 언급하며 무역전쟁 결의

지난 26일 중국 CCTV가 방영한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의 인터뷰는 내레이션을 포함해 43분짜리였다. 런 회장은 인터뷰 중반쯤 화웨이와 미국 간 기술 전쟁을 '상감령' 전투에 비유하며 작심한 듯 열변을 토했다. 그는 "우리는 총검을 들고 백병전을 벌여야 한다. 지금은 (미국에) 맞아 떠밀려 내려갈 수도 있지만 다시 일어나 고지를 기어오른 뒤 결국 정상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상감령 전투를 소재로 한 선전 영화에 나오는 백병전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었다.

24일 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 회장이 중국 선전시에 있는 화웨이 본사에서 외신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24일 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 회장이 중국 선전시에 있는 화웨이 본사에서 외신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그는 26일 방영된 중국 관영 CCTV 단독 인터뷰에서 "승리는 우리의 것"라며 미국의 제재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블룸버그
런정페이 회장은 인민해방군 장교 출신이자 공산당원이다. 1987년 설립된 화웨이가 창업 초기에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인민해방군의 주문 물량 덕분이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화웨이의 실질적인 주인이 중국 인민해방군 아니면 중국 정부이거나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중국 정부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있다고 의심한다.

이에 대해 화웨이는 중국 정부의 지분은 단 한 주도 없고 런 회장 지분도 1% 안팎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확한 지배 구조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런 회장은 올 들어 국내외 매체 인터뷰에서 '화웨이는 절대 중국 정부나 군의 스파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해왔다. 지난 1월 미국 CNBC 인터뷰에선 "중국 정부가 정보를 요청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고객 우선주의와 고객 중심주의가 기업의 가치"라며 "나의 중국 공산당과 오랜 관계가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중국에서 1956년 제작된 영화 '상감령' 포스터.
중국 영화 '상감령' 포스터 - 중국에서 1956년 제작된 영화 '상감령' 포스터. 영화 주제곡인 '나의 조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사용됐다. /북경일보
하지만 이날 CCTV 인터뷰가 방영된 이후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 등 중국 온라인에는 런 회장의 인터뷰 동영상과 핵심 내용을 발췌한 글들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문제가 많다(問題不少)'라는 극소수 반응도 있었지만 '화웨이야말로 미·중 무역 전쟁의 상감령이다' '군복은 벗었지만 런정페이의 가슴속엔 여전히 조국과 상감령이 있다'는 식의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사실 런 회장은 미·중 무역 전쟁이 격화된 2018년 들어 회사 내부 회의나 연설에선 '상감령' 얘기를 여러 차례 거론했지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작년 10월 화웨이 상하이연구소에서는 "우리에게 5G는 세계 고지인 상감령을 빼앗는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대가를 아끼지 않고 승리를 거둬야 한다. 상감령 공략은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렸다"고 독려했다. 우한연구소에서는 "회사는 이미 전시 상태로 접어들었다. 상감령의 고난을 이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중국 매체들은 런 회장의 상감령 발언을 전혀 부각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5월 초 미·중 무역 협상이 결렬되고 이어 미국 정부의 대(對)화웨이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중국 CCTV 영화 채널은 지난 16일부터 '영웅아녀(英雄兒女)'와 '상감령(上甘嶺)' '빙혈장진호(冰血長津湖)' 등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6·25전쟁) 특집 영화를 잇따라 방영하고 있다. 환구시보 총편집인 후시진(胡錫進)은 "갈수록 격렬해지는 미·중 무역 전쟁이 우리에게 조선전쟁(6·25전쟁)을 떠올리게 한다"며 "우리는 지금 상감령 전투 정신으로 떨쳐 일어나 오늘날의 상감령 전투에서 새 길을 열어야 한다"고 선동하고 나섰다.

이런 와중에 이뤄진 CCTV 인터뷰에서 런 회장은 자신과 화웨이가 중국 공산당과 한몸이자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CCTV는 그 같은 런정페이의 주장을 여과 없이 전했다. 중국 정부는 미국의 무역 압박을 "냉전 시대 사고방식"이라고 비판해왔지만, 스스로가 60년 전 냉전 시대의 항미 원조의 논리에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상감령(上甘嶺) 전투

1952년 10월 14일~11월 25일까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오성산 일대에서 벌어진 고지전을 일컫는 중국 측 표현. 우리는 저격능선 전투라 부른다. 43일간의 처절한 싸움 끝에 중공군은 오성산 아래쪽 능선인 상감령에서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 오성산 정상 일대는 결국 휴전선 북쪽에 남았다. 중국은 '항미 원조 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로 미화해왔다. 1950년대 중국에선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의지'를 뜻하는 '상감령 정신'이 풍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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