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美·中 전쟁 끌려들어가는 韓, 정부는 또 무대책인가

조선일보
입력 2019.05.24 03:20

미·중 무역 전쟁의 파도가 빠르게 한국으로 밀려오고 있다. 미 정부가 최근 우리 정부에 '중국 화웨이 퇴출'에 동참해 달라고 수차례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부는 23일 "미측이 5G 장비 보안 확보의 중요성을 (우리 측에) 강조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대중(對中) 공격의 제1 타깃으로 삼은 화웨이의 통신 장비와 제품을 다른 동맹국들처럼 한국도 사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 미 주요 동맹국 중 일본과 호주 정부는 이미 지난해 화웨이 제품 사용을 배제했다. 일본 간판 기업인 소프트뱅크와 파나소닉에 이어 세계 반도체 설계의 70%를 담당하는 영국 ARM도 화웨이와 거래를 중단하기로 했다. 관망하던 독일의 인피니온도 미국에서 생산하는 반도체에 한해 화웨이 공급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총성 없는 '3차 세계대전'이란 말까지 나온다.

한국은 일본·호주·영국 등과 입장이 같지 않다. 한국의 대중 수출 비중은 미국·유럽연합(EU)·일본을 합친 것보다 많다. 2017년 1421억달러로 전체 수출의 4분의 1이다. 화웨이가 직접 산 한국 제품만 51억달러에 달한다. 삼성전자의 5대 매출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스마트폰 사업에선 경쟁하지만 반도체·디스플레이 같은 부품 사업에선 한국 기업의 고객이다. 이런 경제 구조에서 우리가 화웨이 제품을 거부하면 중국의 보복 대상이 될 수 있다. 미·일·유럽에 보복할 카드가 마땅치 않은 중국은 한국을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미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부상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전략을 세우고 실천하고 있다. 화웨이 전쟁은 미·중 패권 경쟁의 한 단면이다. 미·중이 노골적인 패권 경쟁에 들어간 이상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함께'라는 식의 전략은 통할 수 없게 되고 있다. 미국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안보 위협'을 이유로 화웨이를 제재했다. 한국이 화웨이의 출구 역할을 하게 되면 미국은 한국이 미국 안보와 국가 전략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미·중의 화웨이 전쟁은 작년 말 이 회사 창업자 딸이 캐나다에서 체포됐을 때 사실상 예고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동맹국이자 화웨이와 큰 규모의 거래를 하고 있는 한국에 일찌감치 제재 동참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화웨이 이슈는 내용을 밝힐 수 없다"며 '쉬쉬'만 해왔다. 결국 문제가 불거진 지금 보니 그동안 준비를 해온 별다른 대책도 없는 듯하다. 다른 국정 현안들과 마찬가지로 폭탄 돌리기를 하거나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바라보고 있는 건가.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운신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좁은 길 속에서 활로를 찾고 국익을 개척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고 책임이다. 어렵다고 손 놓고 있으면 정부가 아니다. '김정은 쇼'에 들이는 노력과 정성의 몇 분의 일이라도 이 중대한 국가 현안에 쏟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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