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줍줍족

조선일보
입력 2019.05.18 03:06

서울의 새 아파트 1채 추첨 공고를 냈더니 사흘 전 4만7000명 가까이 몰렸다. 접수 홈페이지가 다운됐다. 2년 전 분양한 아파트인데 당첨된 사람이 청약 부적격으로 계약 취소되는 바람에 분양 매물로 나왔다. 2년 새 그 일대 아파트 가격이 4억, 5억원 올랐다고 한다. '2년 전 분양가'로 새 아파트 살 수 있으니 이른바 '줍줍족'이 구름처럼 몰렸다.

▶'줍줍'은 '줍고 또 줍는다'를 줄인 말이다.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낡은 의자 '줍줍'했어요." 남이 버린 가구를 주워가 예쁘게 리폼해 사용하는 인테리어 알뜰족들이 즐겨 쓰던 표현이다. 이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어휘가 요즘은 '현금 부자들, 아파트 줍줍' 같은 부정적 어감으로 변질됐다. 

[만물상] 줍줍족
▶서울 아파트값이 급등하자 정부는 2년간 고강도 부동산 대책들을 쏟아냈다. 투기지역, 투기과열지구로 겹겹이 봉쇄해 대출을 어렵게 해놨다. 투기 차단한다고 아파트 청약 요건도 강화했다. 취지와 달리 엉뚱한 피해자들이 생겨났다. 새 아파트 당첨되고도 너무 자주 바뀐 요건 때문에 청약 부적격자가 되거나 비싼 분양가, 높아진 대출 문턱에 계약 포기자가 생겨났다. 이런 아파트는 청약 자격 없어도 돈만 주면 살 수 있다. 누군가 돈 없어 계약 포기한 아파트를 대출 필요 없는 현금 부자들이 줍듯이 사간다고 해 '아파트 줍줍족'이란 신조어가 나왔다. 정부는 '줍줍족' 대책을 또다시 내놨다.

▶10여년 전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대한민국을 '아파트 공화국'이라 했다. 아파트 공화국의 열기는 식을 줄 몰라 '줍줍족' 말고도 온갖 아파트 신조어가 넘친다. 부동산 커뮤니티에서는 '10억 클럽' 때문에 희비가 엇갈린다. 강남을 넘어 강북까지 10억원 넘는 아파트들이 속속 생겨난 탓이다. 지하철역 가까운 '역세권'뿐만 아니라 별별 '~세권'도 유행이다. 숲 근처 '숲세권', 강이나 호수 근처 '수세권'은 그렇다쳐도 스타벅스 가까운 '스세권', 맥도날드 배달 가능한 '맥세권'까지 등장했다. 호재를 내세워 내 집 가치를 높게 보이려는 심리다.

▶천정부지 뛰는 집값을 정부가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대출을 꽁꽁 억눌러 젊은 층은 집을 못 사고 현금 부자 줍줍족이 유리해지는 규제 일변도 정책도 정상은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젊은 사람들이 목돈 없어도 계약금만 조금 내고 매달 대출금 갚으면서 내 집 장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부동산 정책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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