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70] 백제 숨통 조였던 고구려 전초기지

조선일보
  •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입력 2019.05.15 03:10

서기 475년 9월 고구려의 장수왕은 정예 군사 3만명을 이끌고 백제의 왕도 한성을 포위했다. 이어 네 방면으로 협공하며 성문을 불태우자 다급해진 백제 개로왕은 기병 수십 명과 함께 성문을 열고 달아나다 잡혀 목숨을 잃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이때 백제가 패한 것은 왕이 고구려 첩자의 꾐에 빠져 국력을 낭비하고 고구려의 위협을 간과했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금귀걸이, 남성골산성, 국립청주박물관.
금귀걸이, 남성골산성, 국립청주박물관.
왕의 동생 문주(文周)가 신라로 가서 군사를 빌려 오는 사이 이미 백제의 왕도는 폐허로 변했고 남녀 8000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고구려와 쟁패하며 강국이라 자부했던 백제가 패망의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그는 남은 백성을 이끌고 황급히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다. 오랜 숙적 백제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에서 고구려가 그대로 회군했을 리 없지만 그다음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 없어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 궁금증은 2001년에 우연히 풀렸다. 충북 청원군(현 세종시) 부강리에 있는 남성골산성이 도로 공사 부지에 포함되자 충북대박물관 조사단은 6월부터 시굴 조사를 시작했다. 이 산성은 지표조사 단계에서 확인되었으나 시대나 구조는 알 수 없었다. 조사원들이 겉흙의 일부를 제거하자 여기저기서 목책(木柵)을 세웠던 큼지막한 기둥 구멍이 확인됐다.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해 9월부터 발굴로 전환했다. 조사 대상지 전면을 노출하니 산 위를 감싸 도는 두 겹의 목책이 전모를 드러냈다. 성 안에서는 온돌을 갖춘 집터, 저장 구덩이, 식수 저장용 목곽고(木槨庫)와 함께 고구려 토기·철기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퇴적토 속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귀걸이였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경기 남부와 충북 지역 여러 곳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남긴 성책과 무덤이 차례로 발굴됐다. 고구려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해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한강 이남 지역 곳곳을 손아귀에 넣었음이 차츰 밝혀지고 있다. 그 가운데 남성골산성은 백제의 숨통을 조이던 고구려의 최전선 전초기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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