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식량지원→南北회담' 추진… 국제기구 안통하고 직접 줄 듯

조선일보
  • 윤형준 기자
    입력 2019.05.09 01:31 | 수정 2019.05.09 01:43

    北은 5~6월이 보릿고개… 한국 온 비건과 지원 논의 속도 낼 듯
    800만달러 지원땐 쌀 4000t 수준, 10만t 이상 지원할 가능성도

    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에 공식적으로 나선 것은 인도적인 목적 외에도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미북 대화의 활로를 찾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정부는 8일 방한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식량 지원 방침을 논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5~6월 '보릿고개'가 지나가면 식량 지원의 경제·정치적 효과가 반감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청와대가 7일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정상 간 통화에서 "식량 지원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말했다고 소개한 것도 이 같은 의지와 무관치 않다.

    정부는 식량 지원을 매개로 북한과 대화를 재개한다는 구상이다. 연내 4차 남북 정상회담, 3차 미·북 정상회담 등 '빅이벤트'로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미국에 '올해 말'이라는 대화 시한을 제기했다. 남주홍 경기대 명예교수는 "이미 정부가 장소, 시기,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 밝힌 만큼 인도적 지원도 그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며 "대화가 재개되면 6·15(남북공동선언일), 7·27(정전협정일), 8·15(광복절) 등을 계기로 남북 정상회담을 시도할 수 있다"고 했다.

    개성 간 김연철, 북측과 악수 - 8일 김연철(오른쪽) 통일부 장관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찾아 북측 김영철 임시소장대리와 인사하고 있다. 김 장관은 이날 귀환 후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사명감을 갖고 근무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뿌듯한 감회를 느꼈다”고 말했다.
    개성 간 김연철, 북측과 악수 - 8일 김연철(오른쪽) 통일부 장관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찾아 북측 김영철 임시소장대리와 인사하고 있다. 김 장관은 이날 귀환 후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사명감을 갖고 근무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뿌듯한 감회를 느꼈다”고 말했다. /통일부
    식량 지원은 국제기구를 통하기보다는 우리 정부가 직접 주는 방식이 우선 추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식량 지원을 통해 비핵화 협상의 물꼬를 트겠다는 목표가 있는 이상 직접 지원을 먼저 검토하는 게 수순"이라고 했다. 우선 지원 시기와 규모, 방법 등을 논의하기 위해 남북 당국 간 만남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직접 지원이 쉽지 않을 경우, 남북협력기금을 통한 국제기구 공여나 민간 지원 등의 방법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다.

    정부는 2000년, 2002~2005년, 2007년에 30만~50만t의 쌀을 차관 형식으로 북한에 지원했다. 총 240만t이다. 2006년과 2010년엔 수해 지원을 이유로 각각 쌀 10만t, 5000t을 무상 지원했다. 이 같은 전례로 볼 때 정부는 이번에도 10만t 이상의 쌀을 지원할 가능성이 크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은 최근 '북한 식량 부족량이 136만t'이라고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 설훈 최고위원도 이날 이 수치를 인용하며 대북 식량 지원을 주장했다.

    비건, 일본 거쳐 한국에 - 8일 오후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앨리슨 후커(오른쪽)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비건 대표는 9~10일 청와대를 방문하고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대북 식량 지원 문제 등을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비건, 일본 거쳐 한국에 - 8일 오후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앨리슨 후커(오른쪽)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비건 대표는 9~10일 청와대를 방문하고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대북 식량 지원 문제 등을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조인원 기자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북 제재 국면임을 감안하면 쌀 1만t 미만을 지원하는 게 '긴급 식량 지원'이라는 명분에도 맞는 현실적 방안"이라고 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쌀은 군사 목적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지원 때마다 논란이 됐다"며 "이명박 정부 때처럼 5000t 수준에서 지원하되 북한이 도발 등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단계적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했다. 고명현 연구위원도 "800만달러(약 94억원) 수준에서 지원하는 게 현실적이고 국민 정서에도 맞는다"고 했다. 이는 작년 쌀값 기준으로 약 4000t을 구매할 수 있는 액수다. 그러나 이 경우 자존심을 중시하는 북한이 지원을 거절하며 남북 관계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미국의 의중 역시 변수다. 백악관은 이날 한·미 정상 간 통화에 대해 발표하면서 대북 식량 지원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만큼 식량 지원에는 신중한 입장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말하는 '인도적 지원'은 영·유아나 임산부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며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는 한 대량의 식량을 직접 지원하는 건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대량의 쌀이 넘어갈 경우 화물차 또는 화물선 등의 대북 반출에 대한 '제재 면제'가 필수다. 과정마다 미·북 간 신경전이 계속될 수 있다. 남주홍 교수는 "인도적 지원 과정에서 돌출될 수 있는 남북, 한·미 갈등을 잘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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